실제로 무의식에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실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듯하다. 무의식의 어떤 사실을 응용할 수도 있고, 그 응용의 결과를 예측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꿈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이미지를 산출한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논리적인 분석은 의식의 특권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지식을 이용해서 사물을 선별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주로 본능적 경향에 따라 작동하는 듯하다. 이 경향은 여기에 상응하는 사고형태, 즉 원형의 문법에 따라 표현된다. 어떤 병의 경과를 기록할 경우 의사는 <감염>이라든지, <열>이라든지 하는 합리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꿈은 시적이다. 꿈에서는 병든 몸은 인간이 사는 금생의 집으로, 열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칼 G. 융, 인간과 상징 p78


Blog/에세이 | 2010/01/20 15:55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나에게 없는 것을 말한다. 즉 불행한 상태에서만 행복을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행복이란 찰나의 것이다. 지금 나에게 없어서 불편하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이 어느날 생겼을 때 느끼는 충족감. 그래서 사람들은 소비에서 행복을 찾는다. 문제는 이 사이클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핍이 행복의 어머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도 있는데, 그것은 이 기준이 철저하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즉 아무리 많이 가져도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있는 이상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은 동물의 룰, 정글의 룰이다.

누구든 안 그렇겠나마는 내 삶은 <과연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찾아헤매온 하나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젯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내가 여러 가지로 힘들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는 열 살 때의 나, 스무살 때의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나는 무엇을 바랬던가?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산동네 출신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풍요로운 삶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친구딸'에게는 있었던 '미미의 집'을 가지고 싶어서 울었던 적도 있지만 그걸 가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막장드라마 한 편쯤은 너끈히 쓸 신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하고 번듯한 가족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런 것을 바랐다. 내 삶의 조건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정말 맨밥에 물만 말아 먹어도 배부르고 행복할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여전히 바라는 것들이 있고, 더 나아지고 싶고, 같이 사는 사람들과 툭탁거리기도 하고, 지금은 여건이 안 되어서 못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 여유가 되면 가지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행복을 '그것들을 가져야 생기는 것'으로 여길 때보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 10년 전의 나, 20년전의 내가 되어서 - 지금의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를 되새길 때 느껴볼 때 비로소 그 행복을 '알아챌' 수 있다. 이건 '범사에 감사하라'는 현실안주적 레토릭이 아니다. '세상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자족적 기만도 아니다. 단지 내가 목표로 했던 것에 얼마나 충실하고 후회없이 다다랐고 또 향해 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열 살의 나, 스무살의 내가 되어서 잠시 동안 사무치는 행복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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