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장 19절
시대가 그의 고독을 알아주지 않아 세상을 떠버렸다는 천재, 전혜린의 이름에 있는 '린'자는 '기린 린(麟)'자이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 독일로 유학가 귀국 후 강단에 섰던 그의 존재는 여러 가지로 유별난데, 그 특출남의 시발은 저 이름이 아니었을까 한다. 당시로서는 여자에게 주기에 좀 센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기린 린(麟)'자의 저 기린은 물론 아프리카에서 풀뜯고 사는 평화로운 그 짐승이 아니고, 중국 고전에 종종 등장하는 상상 속의 영수(靈獸)이다. 용의 머리에 사자의 갈기, 수사슴의 몸통, 황소의 꼬리를 가진 데다가 너무나 자비로워서 벌레 하나라도 밟아죽이지 않으려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이슬만 먹고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생겼다.
용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거북이 장수를 의미하듯, 기린에게도 뜻이 있으니 그것은 '특출난 젊은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기린의 '기(麒)'는 양(陽)을, '린(麟)'은 음(陰)을 나타낸다. 그런 고로, 자식이 자라 세상을 뒤흔들 인재로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들은 아들에게 '기(麒)'를, 딸에게 '린(麟)'을 넣어서 이름을 지어주곤 했다. 그러니 전혜린의 부모는 1930년대라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꽤나 야심만만한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이름이란 한 존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하나의 이정표일 것이다. 내 부모님도 내가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린(麟)자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기린(麒麟)이라는 이름을 떡하니 붙여 주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아는 이들에게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 기린이라는 이름은 뜻도 좋고 독특하기도 하지만, 평생 가지고 살아갈 이름으로는 중대한 하자가 있다. 바로 '뛰어난 젊은이'라는 그 뜻 말이다. 뛰어나게 성장하라는 바램은 좋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언제까지고 혼자만 잘난 체로 표표히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 때 같은반 남자애들의 놀림감이 된 것만 빼면 별 불만 없이 지녀왔던 이 이름이, 나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홀로 잘나려고만 하는 내 성정 또한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 그들이 제시한 삶의 방향이 더이상 나를 견인해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즈음이었다. 지금의 공동체를 만나면서, 어른이고 아이고 간에 모두가 '별명'을 지어서 '님'자를 붙여 존대하는 문화를 접하고 새 이름을 고민하게 되었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부모에게 받은 이름이란 곧 부모가 원했던 삶 그 자체이고, 그렇다면 새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내가 바라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호'를 찾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고민이 그랬을까.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일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한참을 끙끙댄 끝에 '시진(示眞)'이라는 이름이 문득 튀어나왔다. 시진. 시진. 부르기도 좋고 뜻도 좋았다. 단지 문제라면 만화가 유시진씨와 헷갈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 공동체에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 성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물다섯에 나는, 더이상 '뛰어난 젊은이'이길 그만두고, '진실을 보는,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내 삶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새 이름은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었고, '지금까지의 나'에 자족해 퇴보하지 않게 해 주었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해 주었다.
새 이름으로 산지 수 년이 지났다. 그러다가 문득 나와 같은 글자를 하나 공유하고 있던 전혜린을 보고는 새삼 옛 이름의 의미를 떠올렸다. 전혜린은 부모가 강요한 삶의 틀에 갇혀서 신음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법대에 가야 했고,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어쩌면 전혜린이 좀더 젊은 시절에, '혼자서 뛰어난 젊은이'이기를 그만두고 부모와는 다른 이정표를 좇아서, 새 이름을 찾아서 갔다면 그의 숙명적 우울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으로, 그때 내가 새 이름으로 갈아타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퍽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사족. 공동체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유시진씨 문제는 온라인에서는 상당히 걸림돌이 되었는데, 그러다가 궁여지책으로 SeeReal을 찾아냈다. '시진'보다는 다소 가벼운 느낌이 있지만, 나는 이 이름도 상당히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시리얼'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한번씩 푸 하고 웃는데, 이 풍진 세상에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더 웃게 만드는 이름이라니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반면에 전혜린의 상대적인 약점은 신체운동적인 영역과 대인 영역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전혜린의 신체 운동적 특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자기 보고 기록을 통해서 평가해보면, 그는 일생동안 신체적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며 건강의 문제를 자주 호소했음을 알 수 있다...(중략)...그러나 전혜린은 신체 건강상의 문제에 대해 수동적으로 불만을 느끼거나 부러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칠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노력이나 시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실제 전혜린의 신체 운동적 기능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정확히 판단할만한 기록은 없으나,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필요를 감지하면서도 그 영역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며 문제점을 느끼면서도 해결할 방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 영역에서 약점을 안고 살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태진(2003). 다중지능 이론의 관점에서 본 전혜린의 삶.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사진출처: http://www.yoga.it/forum/viewtopic.php?t=3123
(웃타나아사나) 이 아사나는 위장병을 치료하고, 간장, 비장, 신장의 기능을 좋은 상태로 만든다. 또한 월경 기간 복부의 통증을 덜어 준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척추 신경은 활기를 찾는다. 이 자세로 2분 이상 있는다면, 어떤 우울한 마음일지라도 사라진다. 이 자세는 쉽게 흥분하는 사람에게 효과가 크다. 그 이유는, 이 자세는 뇌세포를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요가 디피카 p116
전혜린이 요가를 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