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독자와 그들이 지닌 욕망, 즉 소설의 상상적 세계에 실려 간혹 그것을 실제와 혼동하고 싶은, 소박한 만큼이나 정당한 욕망을 비웃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것에 심리적 리얼리즘의 기법이 필수불가결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네 살에 처음으로 '성(Das Schloss)'을 읽었죠. 그리고 그 시절 저는 집 가까이 살던 한 아이스하키 선수를 숭배했습니다. 전 그의 인상을 통해 K의 모습을 상상했죠. 오늘날까지도 그의 모습은 이런 식으로 떠오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이 저절로 작가의 상상력을 보완하게 된다는 겁니다. 토마스는 금발입니까? 갈색 머리입니까? 그의 아버지는 부자였나요, 가난했나요? 당신 스스로 선택하세요!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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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0  행복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 (2)


Blog/에세이 | 2010/01/20 15:55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나에게 없는 것을 말한다. 즉 불행한 상태에서만 행복을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행복이란 찰나의 것이다. 지금 나에게 없어서 불편하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이 어느날 생겼을 때 느끼는 충족감. 그래서 사람들은 소비에서 행복을 찾는다. 문제는 이 사이클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핍이 행복의 어머니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도 있는데, 그것은 이 기준이 철저하게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즉 아무리 많이 가져도 나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있는 이상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은 동물의 룰, 정글의 룰이다.

누구든 안 그렇겠나마는 내 삶은 <과연 행복이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찾아헤매온 하나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젯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내가 여러 가지로 힘들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의 나는 열 살 때의 나, 스무살 때의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로!

나는 무엇을 바랬던가?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산동네 출신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풍요로운 삶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친구딸'에게는 있었던 '미미의 집'을 가지고 싶어서 울었던 적도 있지만 그걸 가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막장드라마 한 편쯤은 너끈히 쓸 신산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완전하고 번듯한 가족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런 것을 바랐다. 내 삶의 조건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지 않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 그것만 이루어진다면 정말 맨밥에 물만 말아 먹어도 배부르고 행복할 것 같았다.

물론 나도 여전히 바라는 것들이 있고, 더 나아지고 싶고, 같이 사는 사람들과 툭탁거리기도 하고, 지금은 여건이 안 되어서 못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 여유가 되면 가지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행복을 '그것들을 가져야 생기는 것'으로 여길 때보다,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 10년 전의 나, 20년전의 내가 되어서 - 지금의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를 되새길 때 느껴볼 때 비로소 그 행복을 '알아챌' 수 있다. 이건 '범사에 감사하라'는 현실안주적 레토릭이 아니다. '세상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자족적 기만도 아니다. 단지 내가 목표로 했던 것에 얼마나 충실하고 후회없이 다다랐고 또 향해 가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열 살의 나, 스무살의 내가 되어서 잠시 동안 사무치는 행복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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