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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0/26 제가 이런 글은 평소에 잘 안쓰지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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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28 건물 하나에 압축된 욕망의 정치학
- 2009/02/28 [단편소설] 우주인류학개론 (10)
+ 자매품
덧붙여 궁시렁
예전 대학언론시절, 캠퍼스의 학생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오해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 언론의 편집장을 하는 '기린'이라는 사람은 남자일거라는 이야기였다. 이름도 다분히 중성적이고(원래는 남자 이름이다) 페미니즘에 비우호적인 태도가 그렇고, 딱딱하고 시니컬한 문체 또한 남성적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때는 내가 기사를 그렇게 쓰나보다... 했는데 창작을 하게 된 지금에 와서도 '남자시죠?'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곤 한다. 나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원숭이엉덩이는빠알개를 읽었던 웹진거울의 편집장 진아님도 '이 사람... 남자죠?'라고 했다고 하고, 거울의 어떤 독자도 '앗 여자셨나요, 창조적인 사람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두루 갖추고 있대요'라고 위로아닌 위로를 건넸다. 대체, 대체 왜?
여기서 고려해볼 수 있는 가설은 다음과 같다.
1. 보통 여성들은 과학적 근거를 들어 구체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일정부분 편견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여성의 3/4은 직관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한다고 한다. 검지가 약지보다 더 긴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나? 넷째 손가락 무지하게 길다... 수학과 과학 엄청 좋아한다. 은하수를 보면 '몇만 광년을 거쳐 왔길래 저렇게 반짝일까...' 라고 생각하고 반딧불을 보면 '불규칙 패턴이 어떻게 동조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를 고민한다. 물론 그렇다고 은하수와 반딧불을 덜 아름답거나 덜 신비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구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2. 내 글에 소위 '여성적'이라고 하는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문체가 없다.
요새는 많이 둥글둥글해졌지만, 기본적으로 내 글에는 냉소가 배어있다.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도 분석적으로 해석하곤 한다. 또한 온라인 글쓰기에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기분이 너무 가라앉고 힘들다'라는 감정은 일기장에는 쓸 수 있지만 공개적인 곳에는 쓰고 싶지 않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원칙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내가 온라인에 쓰는 글들은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안 감성적인 것들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3. 사실 나의 내면은 남성이었다.
...아니 뭐, 그럴지도 모르지 않는가...
근데 난 단 한번도 나의 성정체성을 의심해본 일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남자가 좋다.
나와 같은 신앙(=진화교)을 공유하는 모 님의 경우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의 구애 행위를 보나 긴팔원숭이의 구애 행위를 보나 본질적으로 같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간주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느껴진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여성과 여성성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페미니즘의 이론적 한계와 주관성이 거슬리고, 여성 특유의 감성적 필치 아래에 숨은 심리적 구조에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다른 가설이 있으면 알려주시라.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하다. 한두번도 아니고 열댓 번쯤 '남자인줄 알았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고민할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대개의 경우 웹진은 오프라인 종이잡지에 비한다면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 결과 웹진은 커다란 이윤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매체를 발행하면서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손쉽고도 유용한 통로가 된다. 하고 싶은 말은 넘치나 당장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웹진은 사실 일종의 기적이며 마법이다.
아직까지 웹진은 자체적인 미디어 활동만으로 금전적인 이윤을 내기 힘들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 웹진을 통해 창출하고 생산할 수 있는 가치는 무수히 많다. 웹진은 컨텐츠를 생산할 수 있고, 이슈를 제기할 수 있으며, 재능있는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독자들에게 숨겨진 보석의 존재를 알리고,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의 논리에 매인 기존의 집단이 창출할 수 없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만 빼고는 놀랄 정도로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뚜렷한 지향점, 헌신적인 사람들, 서로간의 신뢰, 효율적인 조직구조, 적절한 정도로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시스템, 등등등.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가진 세 개의 웹진에서 편집장 or 창립멤버의 역할을 했으며 각각의 웹진을 말아먹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나의 경험을 반추해본 결과, 웹진에는 필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권력축이 존재한다.
1. 웹진의 컨텐츠를 기획하고 필자를 섭외하며 업데이트를 관리하는 편집장.
2. 외부의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한번 온 사람들을 계속 방문하게 만드는 스타 작가.
3. 사이트의 기술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엔지니어.
그리고 성공적인 웹진을 운영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요건이 있다. 바로, 이 세 주체의 권력분립이다.
웹진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장하고 변모하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역할을 반드시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맡아야 한다. 물론 편집장 외에 편집진이 있을 수도 있고 스타 작가가 여러 명일 수도 있고 엔지니어와 웹디자이너를 제각각 다른 사람이 맡을 수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역할을 겸해서는 곤란하다. 1
만약 편집장이 스타 작가를 겸한다면 웹진 전체의 색깔이 한 인물에 물들어 아류를 양산할 위험성이 있다. 편집장이나 스타작가가 엔지니어를 겸한다면 기획업무 혹은 스타성 유지에 들어가야 할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셋 다 한 사람이 전담한다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로와 고독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웹진들은 자본과 인력이 부재하거나, 혹은 사람이 있더라도 불필요하게 유능하거나 독점적인 성격의 누군가가 혼자서 이 세 가지를 다 해버려 삼권분립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내가그랬다). 일단 권력독점이 시작되면 이것은 심화되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해당 웹진은 매체로서의 생명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자본이 투여되지 않았으므로 흥행에 실패하더라도 꼭 망하는 것은 아니나, 변모하고 성장하지 않는 매체는 때로 망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망했더라면 훌훌 털고 다른 것을 시작해 더 나은 것을 만들 수도 있었던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왜 권력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공적인 웹진이 될 수 없을까? 이는 단순한 원리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이 특정 영역에 쏟을 수 있는 관심과 애정과 노력의 정도는 유한하고, 그렇다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는 쪽이 가장 효율적이다. 설사 유능한 편집장이 프로그래머 뺨치는 기술력의 소유자이고 엔지니어 후보자가 이제 막 HTML을 떼고 CSS를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편집장과 엔지니어의 정체성은 분리되는 쪽이 낫다. 사장이 비서보다 타이핑을 잘 하더라도 사장은 경영에 전념하고 비서에게 타이핑 업무를 위임할 때 더 효율적인 업무처리가 가능한 것이다. 경제학의 고전적인 이론, 비교우위/비교열위의 원리다.
더구나 웹진은 효율성의 문제 못지않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또 있다. 참여자들을 성장시켜야 하는 임무가 있는 것이다. 급여나 원고료를 주기 힘든 웹진의 특성상, 사람들은 돈 대신 독자와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염두에 두고, 또 재량의 여지를 보고 기꺼이 참여한다. 권력분립은 이 '성장의 기회'를 좀더 고르게 분배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즉 좀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재량을 가지고 역할을 맡다 보면 실력은 늘게 마련이며, 결과적으로 해당 구성원은 웹진에 참여하는 경험을 통해 돈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얻게 된다(때로 그걸로 돈을 벌기도 한다! ...내가그랬다).
내가 창작을 시작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제공해 주었던 웹진 '한페이지단편소설'의 경우 너무나 훌륭한 시스템과 매력적인 스타작가와 정력적이고도 헌신적인 편집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도약하지 못한 채 정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처음에 나는 한단설이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장르문학창작집단들이 미스터리/판타지/SF 등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소재와 주제에 있어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으며, 1페이지에서 시작해 점점 맷집을 키우도록 독려하는 시스템이 워낙 훌륭하고, 또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글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준히 단편들이 올라오고 때로 한단설에 글을 쓰던 작가들이 등단하거나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은 가끔 들리지만 '한단설' 자체가 유의미한 브랜드나 창작집단으로서 성장하고 있지는 않다. 웹진거울이 출판사의 러브콜을 받아 자체 작가군을 중심으로 상업적인 단편선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으며 배명훈을 위시한 스타성있는 작가들을 배출하고 소속 작가들의 공식적인 프로필에 거울의 이름이 으레히 포함되는 상황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나는 그 주요한 원인이 한단설의 경우 거울과는 달리 웹진의 세 가지 권력을 모두 한 사람이 떠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거나 저런거나 다 떠나서, 한 사람이 없어지면 매체가 무너지는 구조는 아무리 봐도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 권력의 중추가 취직을 하거나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어지거나 그냥 지쳐버리면 웹진은 공중분해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내가 겪었고, 다른 이들이 겪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꼭 웹진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조직은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제공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이 들어와서 활력을 불어넣으며,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어도 조직의 동질성을 유지하며 성장하고 변모할 때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이러한 웹진이 되기 위해서는 저 세 가지의 축을 담당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기능하면서 모두가 동의하는 몇 가지의 목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일단 조성되고 안정적인 권력분립의 구조가 정착될 때,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기꺼이 활용해 조직의 빈 공간을 메우려는 욕구를 가진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란 참 신기해서, 자기가 수혜자로서 받은 것보다 기여한 것이 많을 때 해당 집단에 더 큰 애정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웹진을 포함한 모든 미디어 성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0번의 조건을 전제로 한다. 0번이 무엇인고 하니,
0. 언론매체를 만드는 사람들은 독자에게 전달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자신들의 이러한 지향과 시대정신을 정기적으로 점검해 조율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나는 과거의 웹진들에서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삼권분립 또한 성공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삼권분립의 원리는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뚜렷할 때 조직을 살리고 사람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거의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는 웹진을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은지 잘 알지 못했고, 그저 판을 깔아놓고 혼자서 놀았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이룰 수 있었던 가능성을 활용하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 결과는, 웹진의 소멸이었다.
아직도 궁시렁(클릭)
성공하는 웹진의 부수적인 조건
![]() |
타워 - ![]()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
배명훈 연작소설 '타워' 에피소드 2, 3 리뷰
환상문학웹진 거울 72호 원고
뒤에서 궁시렁
하나의 컨텐츠가 두 군데 이상 올라와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링크해둡니다.
근데 왜 타워 리뷰는 왜 올려놨냐고 하면... 그건... 좀더 많은 사람들이 보라고...-_-;
나에게 리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도 되는 거지만, 창작물은 안 그런 것 같다.
아무튼
* 이다님은 너무너무나 멋지다. 내가 남자였으면 청혼했을 것 같다.
* 합평회에서 들은 이다님의 말에 따르면 내 소설은 전부 다 한 가지 이야기의 변주라고 한다....뭐 김혜린 같은 대가도 몇십년간 주구장창 딴남자한테 갔다가 돌아오는 여자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게 딱히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 무이를 소개합니다 이후 이런 형식으로 여러 개의 리뷰를 써보려고 했는데, 리뷰 하나당 소설 하나에 맞먹는 창작 에너지가 들어간다. 리뷰라고 해서 그만한 에너지를 들일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데, 문제는 예측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청탁을 받을 수도 없다!) 이 '리뷰소설'을 쓰려면 책과, 저자의 마음과 진심으로 만나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그래서 소설리뷰를 오십개쯤 써서 책으로 엮어 보려던 나의 구상은 무기한 연기... 한 이십년쯤 지나면 책 한권 분량이 나오지 않을까?
* 나에게 있어서 배작가님은 타파의 대상이고, 이다님은 흠모의 대상인 것 같다.
* 이다님의 소설, 특히 '멀리가는 이야기' 기승전합 네 편을 영역(英譯)해서 출판하면 휴고 상이나 네뷸러 상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다. 동의한표.
이 리뷰는 다음과 같은 책/웹사이트에 수록된 이다님의 단편을 읽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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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났어 - ![]() 배명훈.김보영.박애진 지음/행복한책읽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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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Robot 유, 로봇 - ![]() 이영수(듀나) 외 지음/황금가지 |
- 0과 1사이(웹진 크로스로드)
- 땅 밑에 1(웹진 크로스로드)
땅 밑에 2(웹진 크로스로드)
- 웹진 거울 ida 시간의 잔상(중단편) 게시판
- 김보영 SF 중단편집 '멀리가는 이야기'(전자책)
* '누군가를 만났어'에 실린 '종의 기원', '미래로 가는 사람들'과 'U,Robot'에 실린 '다섯 번째 감각'은 단편집 '멀리가는 이야기(종이책 절판, 전자책만 구입가능)'에서도 볼 수 있다.
그밖에 이다님의 다른 소설은 이런 것들이 있다.
- 스크립터(문장 글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별 생각 없이 한 장르문학 잡지의 단편소설들을 휘휘 넘겨보다 한국어라 오히려 낯설게 보이던 이름 석 자를 발견했던 그날을. 외국 이름의 외국 인물들이 번역스러운 문체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은 장르 소설들 사이에서 한국 특유의 꿉꿉하고도 까끌거리는 공기를 느꼈던 그 순간을. 이건 장르가 뭐지? 순수문학인가? 하면서 술술 읽다가 어느새 안드로메다로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황당함을.
SF의 클리셰 오십 개쯤은 앉은 자리에서 줄줄 꿸 수 있는 골수 장르 독자에게도, SF를 '공상과학소설' 로 알고 있는 일반독자에게도 배명훈을 처음 접하는 일은 이렇듯 조금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한국식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건 아니건, 배경이 한반도의 지방 소도시건 우주의 한복판이건, 그의 인물들은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한국식으로 행동하며 한국식으로 말한다. 그렇게 행간에 우리와 멀지 않은 유전자를 품고 있을 인물들이 우주에 나가서 중력의 부재를 고민하고, 떨어져 있는 애인의 변심을 걱정하고, 새로운 세계의 경이에 맞닥뜨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영미권의 SF독자들이 자국 작가의 장르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쾌감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한다.
또한 배명훈은 '과학적 사유를 작품을 끌고가는 동력으로 사용한다'는 SF의 본래 정의에 충실한 자신만의 세계를 곧잘 창조하는 작가다.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한 폐해나 외계문명과의 조우, 인간다운 로봇을 그리지 않고도 과학소설을 잘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는 독특한 학문들이 종종 등장한다. 유령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고고심령학, 우주를 유영하는 거대어류 포획에 관한 우주수산학, 조개껍질에 각인된 언어를 연구하는 패류문헌정보학 등 배명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을 것 같은 학문분야를 양산하던 그가 또 새로운 학문을 하나 창시했다. 이름하여, 권력물리학.
이 '권력물리학'은 무난한 선물로 곧잘 애용되는 고급 양주들이 받는 이의 뱃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다시 선물로 포장되어 사람 사이를 떠도는 관습을 통해 구체화된다. 술병에 전자인식 태그를 부착해 그 소재를 추적하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권력의 형태를 마치 중력장과 같은 하나의 장(場)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장 분석의 용이함을 위해서였는지 인구 50만 명이 상주하는 674층의 마천루가 축조되었고, 그 안에서는 어느새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를 꼭 빼닮은 사람들이 제각기 상승의 욕구를 품은 채 생존을 위해 버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타워'와 배명훈의 가치가 이런 기발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발상이 되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한 작가의 출발점을 규정한다면, 그 이야기 안의 세계를 얼마나 정교하고 그럴듯하게 그려내느냐는 그의 내공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명훈은 '타워'를 통해 구축한 초고층 건물 생태계의 묘사로 독자를 자기 세계로 빨아들이는 능란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기 위해 몇 번이고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하는 지난한 여정, 땅에서 멀어질수록 말 그대로 상승하고 있는 계급적 구조, 광고수익을 위해 따스함을 포기해야 하는 빈한한 이들의 비애까지.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면 그것은 도시 곳곳에서 모르도르를 닮은 고층빌딩이 쉬임없이 올라가는 우리네의 삭막한 풍경을 떠올리게 해서 그럴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가 전에 없이 새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배명훈이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회과학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를 접한 순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빠져든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망의 본질을 에둘러 가지 않는 정공법으로 툭, 툭 건드리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처럼 배명훈은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있을 법한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에서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렇기 때문에 '타워'는 '현실'을 '지금까지 존재했던 현실'로 파악하는 순문학 작가들에게는 강림하기 힘든 발상인 것은 물론, '사이언스 픽션'의 '사이언스'를 자연과학이나 공학에 한정지어 생각하는 보통의 장르문학 작가들에게서도 좀처럼 만들어지기 힘든 이야기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붙을만한 장르를 하나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예언하건데, 배명훈의 첫 연작소설 '타워'는 장르소설의 범주를 뛰어넘는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그 한국적이면서도 쓴웃음 나는 풍자성을 고려해보면 영화화의 가능성을 점쳐봐도 그리 무리한 전망은 아니어 보인다. 그러니 서두르시라.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너 그거 읽어봤어?'라고 호들갑스럽게 떠들 때에, 훗 하고 썩소를 날리며 '난 그거 뜰 줄 진작 알아봤어'라고 한 마디 던지기 위해서라도. 아직 늦지 않았다. 하루빨리 연재독자의 대열에 합류하시길. '타워'는 이제 막 하나의 장(章) 만을 선보였을 뿐이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71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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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 ![]()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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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머리손톱'은 사실 작년 4월쯤에 완성이 됐었거든요.
이번에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초청단편으로 올라가서, 링크로 대신할까 합니다.
거울 초청단편 :: 우주인류학개론
여담인데,
십개월간 뮤즈가 강림하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분석해보니,
제가 뜨개질에 너무 심취해 있었더군요.
저에게 뜨개질과 창작은 양립할 수 없는 듯해요.
실이 떨어져서 좀 쉬고 있었더니 갑자기 소설이 뚝 하고 하나 떨어졌지요.
아무튼, 즐기시길.










교보문고 웹블로그에서 연재중인 이다님의 장편소설.
rss
어쩌면 신작의 성과가 재개장일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나요?
이번 건 스타일이 달라서인지 덧글이 없어 궁금...
잘 읽었어요. '뜨거운 대기', '차가운 뱃속에 아지랑이'라는 표현들 유니크하고 인상적이에요. 오싹오싹하면서 감동적이네요. 좋은 글 선물해주셔서 감사해요.
최근에 읽었던 보네거트의 소설 'Bluebeard'에 보니까, '작가는 독자 한 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사실 그거 비밀인데(...)
저는 한 편을 쓸 때마다 그전에는 안해봤던 것을 시도해보고 싶어해요. 안 그러면 저 스스로가 재미가 없거든요. 그걸 저 혼자는 '과제'라고 하는데, 이번 단편에는 과제가 꽤 많았어요. 3인칭, 보네거트식의 시간교차 플롯, 풍경의 묘사, 주인공의 침묵, 인물들의 행동 묘사에 비환상성까지. 에구구구구.
(사건과 기승전결이 명확한) '본격창작'으로 들어선 뒤에 안 환상적인 소설은 처음 써보는데, 이게 참 어렵더군요. 안 환상적이면서 몰입을 유도하거나 소설적인 반전을 꾀하려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아져서말이죠. 자꾸 환상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쓰고보니까 환상적이든 안 환상적이든 소설이 된 이상은 같은 종류의 '구라'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 딱 꼬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다만 순문학의 이상한 장르(네... 그건 장르입니다)적 규칙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건 어떨까 했던 건데, 문제는 SF라는 장르 자체가 서구에서 탄생한 것인 만큼 그 장르의 규칙 자체가 뭔가... 안 맞아요. 단편 SF의 최고봉이라고 할만한 테드창을 읽어봐도, 잘 썼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정신세계에 매혹되지는 않아요.
요는 제가 하고 싶은 게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건데... 그래서 이것도 그 징검다리 중의 하나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