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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머리손톱'은 사실 작년 4월쯤에 완성이 됐었거든요.
이번에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초청단편으로 올라가서, 링크로 대신할까 합니다.
거울 초청단편 :: 우주인류학개론
여담인데,
십개월간 뮤즈가 강림하지 않은 이유를 곰곰이 분석해보니,
제가 뜨개질에 너무 심취해 있었더군요.
저에게 뜨개질과 창작은 양립할 수 없는 듯해요.
실이 떨어져서 좀 쉬고 있었더니 갑자기 소설이 뚝 하고 하나 떨어졌지요.
아무튼, 즐기시길.
하나의 컨텐츠가 두 군데 이상 있는 것을 좋지 않다고 생각하므로(유일컨텐츠원칙), 거울의 링크로 대신합니다.
거울초청단편 : 누에머리손톱

"저기, 혹시 저에 대해서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닌가요?"
그녀가 느닷없이 내게 꺼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한 반응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녀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으나, 이내 그 눈동자에서 백와트짜리 전구 다섯 개가 동시에 켜진 것같은 빛을 번쩍였다.
"나를 뭘로 보시는 거에요?"
그 말에 우리는 둘 다 피식 웃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모습이다. 도서관 구석에서 최소한 오 년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소외되었을 두꺼운 책을 발굴해 아령처럼 들고 다니며 학교 식당 앞을 활보하던 그 표정, 미소, 눈빛. 애매하고 모호하며 잡히지 않는 느낌을 단 한마디로 이름붙여 사람들 앞에 꺼내놓던 의기양양함. 내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시를 쓰고싶다 마음먹고는 힘겹게 털어놓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던진 한마디. 그럴 것 같았어요. 나는 항상 그 모든 것에서 불가사의한 에너지를 느꼈다.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요."
그런가. 하지만 난 당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걸. 파인더로 보이는 세상 속의 그녀는 가끔은 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난 카메라 안에 있는 작은 암실에 들어가 매직미러로 그 삶을 엿보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렌즈 뒤에 숨는 것은 편리한 일이다. 내가 그 이마와, 귓불과, 머리칼과,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두 줄의 주름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까.
"대체 저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없는 듯 꺼낸 내 말을 듣고 난감하다는 미소가 돌아왔다. 쌍꺼풀이 없어도 저렇게 큰데, 안그랬다면 얼마나 더 컸을까. 그 눈이 똑바로 나를 바라본다. 거부할 수 없는 눈.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항상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차갑다. 날카롭다. 건방지다. 그 눈동자를 보고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몽롱해지곤 했다. 사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눈길을 피하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조금만 더 그러고 있으면 그 눈이 내 비밀을 모조리 빨아들일 것만 같아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숨이 턱, 막힌다. 그렇다. 대체 그녀는 나의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걸까. 나는, 나는, 남자이고, 좀 소심한 편이고,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는 무대 뒤에 있는게 편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건 대부분 해줄 수가 없고... 그럴 뿐인데. 하지만 아주 가끔, 내가 의미있는 존재라고 느낄 때는 있었다. 후배들이 공연용 야외무대를 만들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할 때 지나가던 내가 '우유박스를 쌓아도 된다던데'라고 말하자 그들이 지었던 놀라움의 표정, 그리고 환호. 축제때 주점을 차려놓고도 막상 손님이 몰리자 모든게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 밀가루를 사오고 의자를 빌려오며 쓰레기를 치우던 나를 보고 동기들이 보내던 감탄의 눈길. 그걸 보면 아주 잠깐, 나도 빛나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 잠깐 반짝 하는 것 같다고요?"
또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저거다. 저 미소 때문이다. 저 앞에만 서면 나는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물론 그녀가 나를 꿀꺽 집어삼킨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분명 나는 그런 상태가 되고 만다. 저 아몬드 모양의 눈가에 잡히는 두 개의 주름 사이에 꽉 사로잡힌 것처럼.
"가끔만 빛나는 별도 있어요?"
뭐라고요. 지금 내가, 별이라는 겁니까. 항성이라는 거냐고요. 위성도 아니고, 행성도 아니고?
"하긴, 그렇겠네요. 별이야 자기가 빛나는 줄 어떻게 알겠어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열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가야만 한다. 아직, 아직 그녀가 한 말에는 대답도 하지 못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십오 분만, 아니 오 분만 더 있어도 뭔가 말할 수 있을텐데. 하지만 내 사정과는 상관없이 기차는 도착했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고마웠어요. 즐거웠고요."
이런 게 아니다. 내가 하려던 말은. 해야 하는 말은. 몇 년이나 목구멍 아래 어딘가에 묵혀두고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말은. 그러니까, 그건, 아까 그녀가 했던 말. 그것. 바로 그것.
"그리고 저도..."
왜 나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가방을 집어들며 열차에 올라야 하는 건가. 영화에선 차시간이건 뭐건 그냥 보내버리고 텅빈 플랫폼에서 하는 말이잖아. 그리고 프렌치 키스를 하면서 엔딩크레딧을 올리는 거잖아. 근데 왜 난 이게 막차라는 걸 이리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거야. 내일 출근시간이 지금 왜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데. 어째서 난 이토록 중요한 말을 고사리가 삐져나오는 보따리를 짊어진 할머니에게 길을 비키면서 해야 하는 거냐고.
"사랑합니다."
역무원이 마지막 사람들을 태우고 기관사에게 손짓을 한다. 열차 출발합니다. 문 닫힙니다. 속히 승차하세요. 지금 내 표정이 어떨까. 진짜 바보같겠지. 열차에 올라서서 그녀를 내려다본다. 아직 내 시선은 그녀의 인중과 콧날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눈, 눈을 마주보아야 한다. 문이 닫히기 직전,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는 취익. 한 솔로가 탄소로 냉동될 때 정확하게 이런 소리가 났다. 역무원은 깃발을 흔들고 열차는 서서히 움직인다. 그녀는 내게 양 팔을 휘휘저으며 커다란 미소를 보냈다. 그걸 보며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작아지고 열차는 덜컹거리며 바깥의 풍경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문 뒤에서 한동안, 내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열기에 참을 수 없는 더위를 느끼며 주저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한단설 투고작)

오랫만에 찾아간 집에서 엄마는 대뜸 내 방부터 치우라고 했다.
"니 짐들 때문에 그 방은 쓰지도 못하잖아. 가져가든지 버리든지 어떻게 좀 해."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내 물건을 멋대로 버리거나 건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우리 엄마의 신경질쯤은 탄압 축에도 안 들어갔다. 학교다닐 적 내 친구들이 내신성적 하락등의 사유로 만화책의 '분서갱유'를 감내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너 낼모레면 서른인데 언제까지 그것들 다 끌어안고 살래? 사촌동생들이라도 좀 주던지."
동화책, 판타지 소설, 손때묻은 화집과 시집까지도 때가 되면 그들의 차지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만화책만은 내주기가 싫었다. 누가 알까, 거기에 배어 있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무얼지. 얼핏 봐도 천권은 족히 넘는다. 잘도 모았다 소리가 내입에서도 절로 나왔다. 책상에 붙은 책장부터 한쪽 벽을 메운 두 개의 체리목 책장까지, 온통 만화책이다. 1권부터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인 책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가 빠진 책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빼먹고 샀을리는 없는데.
<반장, 니가 이런 걸로 걸릴 줄은 몰랐다.>
소지품 검사 시간, 고3때 담임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때 뺏긴 책은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그날로 즉시 '청소년 유해 도색출판물'들과 함께 도맷금으로 묶여 소각로에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담임 앞에서 감기걸린 목소리를 흉내내어 야자를 빼먹고 안양 어딘가의 도매상까지 가서 구해온 절판본이었다. 친구에게 보여준다고 가방에 넣어왔던 게 화근이었다.
책장을 훌훌 넘겨 훑어보았다. 참, 그때는 정말 모의고사 점수 일이십 점보다 이게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나이먹어도 절대로 이런 생각은 안하리라고 다짐했건만, 그래도 지금와서 보니 뭐가 그렇게 중요했는지 조금 헛헛해졌다.
<판타지> <일본판 원서> <잡지분철> <소년만화>
박스 위 네임펜으로 찍찍 그어 써놓은 내용물의 정체다. 뜯어보지 않아도 대강 뭐가 들어있을지 짐작이 간다. 이것만 빼고는.
<이해불능>
정말 이해가 불가능한 설명이다. 내용물의 정체를 밝히려 박스테입을 북북 뜯었다.
책등을 주욱 훑어보고는 이내 알았다. 아, 이거였구나. 그건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책들만 모아놓은 상자였다. 제대로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은 것들이다. 다른 만화책들이 적어도 십독에 이십독은 거쳐 거의 대사로 연극을 할 수 있을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에 비하면 홀대도 이만저만 홀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이걸 왜 샀을까.
그건... 생각났다. 그애가 맡긴 책들이다.
<엄마가 분리수거차에 갖다버리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반밖에 못 내놨어. 이거라도 니가 좀 갖고 있어.>
밤새 울었던 듯, 그애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박스를 건네주는 그 애도, 받는 나도 무슨 사화에 연루된 조정대신들처럼 애통하고 비장했다. 물론 피자 한 판과 콜라 몇 잔으로 이내 우리는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지만.
그전에도 종종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내 방이 우리의 공동 서재로 바뀌면서 일요일 오후는 약속이나 한 듯 함께였다. 우리는 새로 산 만화책을 서로 권하면서 그애가 사온 떡볶이를 먹거나 퉁퉁 불어버리는 스파게티같은 것을 같이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는 우리집 거실 소파에 눌러앉아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말없이 그림과 말풍선의 세계로 점프했다.
<어때? 괜찮지, 좋지 않아?>
솔직히, 우리의 취향은 잘봐줘도 절반 정도밖에는 겹치지 않았다. 화끈한 로맨스, 빡센 드라마, 화려한 그림체를 선호하는 나에게 그애가 권하는 책들은 대개 좀 밋밋했고, 심한 경우엔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책장 속의 만화책들이 쌓이다 못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질 즈음, 그애의 책들이 박스행 1순위가 됐던 것이리라.
물론 그 책들이 그렇게 귀양을 갈 수 있었던 건 주인의 출입이 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애와 나는 제각각 다른 대학에 갔고, 나는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갔고, 두어 번쯤 서로의 집에 놀러갔지만 왜인지 더이상 만화책은 보지 않았다. 그애는 만화를 향했던 한때의 불타는 열정을 연애와 동아리 활동으로 돌린 모양이었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영화를 보든, 엠티를 가든 밴드를 꾸리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은 부족했고 할 일은 널려 있었다. 방구석에 베개를 괴고 앉아 만화책을 뒤적이는 것 말고도.
대체 어땠길래 이걸 읽어보지도 않았을까. 이해불능 박스에 담긴 책들을 하나씩 펼쳐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빨려들었다. 미묘한 감정선, 대사보다는 몸짓과 표정으로 나타나는 이야기, 어른 여자의 고민들. 그렇다. 그애는 그때 이미 나보다 훨씬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기고만장했던 내가 생각한 것과 달리, 나는 별로 어른스럽지 않았다. 심통난 어린애였고, 꿈꾸는 소녀였다. 이세계(異世界)로 날아가 어느 별의 왕자와 만나 불타는 로맨스가 꽃피기를 갈망했던. 그리로 도망갔던. 끝내 알을 깨지 못한 채 불쑥 다른 알로 옮아가버렸던.
오랫만에 휴일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이제는 골방이 되어버린 내 방 구석에 늘러붙어 박스 안의 책들을 전부 다 읽었다. 십 년의 시간이 지나 비로소 진짜 그애와 만난 느낌이었다. 정리를 시작하기 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이해불능 박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모네 집 주소가 붙어 택배트럭행이 되었다. 물론 내가 더 삼매경에 빠지지 않고 서둘러 현실로 복귀할 수 있었던 건, '또 만화보고 퍼질러 있냐'는 엄마의 일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롱 위와 벽장, 베란다에 방치된 상자들을 정리하는 일은, 청소라기보단 시간여행에 가깝다. 상자 속의 물건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생활의 쇼윈도에서 밀려나 창고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매일같이 달력 너머로 조금씩 흘려보내는 한 인간의 부스러기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만다. 그리고 나는 아주 드물게, 거기서 추억 이상의 것을 건져내는 행운을 만났다. (한단설 투고작)

아침에 이빨을 닦다가 문득, 임신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이십팔일, 저번 생리가 크리스마스 즈음이었고 내 주기는 삼십일을 넘은 적이 없으니 벌써 나흘이나 지난 셈이다.
"어쩌긴... 곤란하지."
정초부터 방구석에 퍼질러 앉아 시간을 죽이다 '내가 임신하면 어쩔거냐'고 한번 던져 본 질문에 무슨 촉촉하고 간지러운 답변을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얍실하게 째진 눈을 살짝 흘기며 툭하고 내던진 대답을 듣고는 살짝 열이 받쳤던 것 같다. 그래? 니놈이 애는 싫어도 이건 안 마다하겠지. 두말없이 입을 맞추고 윗옷을 벗겼다. 별 말이 필요없는 익숙한 수순. 그리고는 침대 근처의 실내온도가 30도쯤으로 올라갈 무렵 정해진 매뉴얼같은 타이밍에 콘돔서랍을 여는 그의 손을 살짝 밀면서 '오늘은 괜찮다'고 일러주었다. 아까의 대화가 조금은 생각났을 법도 하련만 수컷의 DNA에는 '공짜 떡을 거절하지 말라'는 금언이라도 써 있는건지 그 손은 미련없이 서랍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오늘이다. 당시 머릿속으로 후다닥 계산해본 바로는 99%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70%밖에는 안 안전했던 것 같다. 아니, 50%인가?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건가!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들이 흘러갔다. 아직 수습딱지도 못 뗀 주제에 나 임신했어요 하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우리 회사에 산휴 제도가 있긴 하던가. 스물일곱, 속도위반으로 결혼하자면 지나치게 적당한 나이긴 하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길길이 뛸 것이다.
"너 그새끼 아직도 사귀냐?"
아마 이러시겠지. 지방대 애매한 과를 나와서 사시한다고 고시촌에 죽친지 칠년 째, 여태껏 1차 한번 못붙고 있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좀 그렇긴 했다. 그런 주제에 우리 집이 빈 틈을 타 방사를 벌이다 예정없이 돌아온 아버지한테 딱 걸린 삼년 전부터 그는 영원한 죽일놈이 되고 말았다.
"대체 그런 남자, 어디가 좋은 거야?"
거의 언제나 내 편인 동생마저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꿋꿋하게 카운터파트를 고수했다.
"언니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남자 사귈 수 있잖아. 그오빠가 돈이 많아, 학벌이 돼, 키가 커, 성격이 좋아?"
정력이 좋잖냐.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빈 말도 아니었다. 이리저리 날 찔러보던 남자들이 '왠지 난 안될 것 같다'며 제풀에 지쳐 떨어져나갈 때 가진건 정말 뭣밖에 없으면서 불가사의한 자신감으로 무장한 폼이 좀 멋져보일 때가 있었다. 게다가 '니가 잘나봤자 얼마나 잘났냐'라며 슬쩍 뒤에서 껴안았을 때 왜 난 다리에 힘이 풀렸던 걸까. 그때부터 내가 좀 밑지고 들어갔던 것 같다. 몇 번이고 헤어져 딴 남자를 만나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서너 번, 그때마다 그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초라한 고시촌 자취방에서 승리자의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아마 나만한 놈 찾긴 쉽지 않을걸.'
하지만 임신, 임신이라... 그건 단순히 '나인 먼스 미라클'같은 얘기가 아니다. 그건 내가 그 얍실하게 찢어진 눈을 매일 아침 보면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나는 회사 다니며 돈 벌고, 남편은 고시공부하고, 애는 놀이방에?
문득 그가 처음 사시를 봤을 때 시험장에 마중나갔던 풍경이 떠올랐다. 아주 약간 수능시험장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였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가 좀 많았다. 내 옆에서는 아무리 잘봐줘도 중년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남자가 웬 대가족의 환대아닌 환대를 받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와이프, 딸과 아들, 장인과 장모까지 총출동해서 '박서방 이번엔 좀 잘봤는가'라며 격려인지 힐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네는 모습은 거의 공포영화 수준이었다.
가족. 가족에 아이들이라. 어쩌면 나보다는 그를 더 닮았을 작은 인간을 내 뱃속에 이미 기르고 있다는 뜻인가. 아주 약간,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나와, 그를 닮은 아이들. 그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마음 속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생각이 아닌 어떤 것이 선명하게 글귀처럼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죽어도. 싫어.
순간,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통증이 날카롭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 왔구나. 그리고는 이내 주르륵 하는 낯익은 촉감.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려 손님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 붉은 색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산뜻한 기분으로 침대에 앉았다. 드르륵 드르륵. 책상 위의 핸드폰이 두 번 짧게 울렸다. <오늘 뭐할 거냐.> 내가 오늘 아침 겪었던 질풍노도를 전혀 알 리가 없는, 예의 그 '용건만 간단한' 문자였다. <에버애프터에서 좀있다 봐.> 항상 죽치는 까페 이름을 댄 건, 그의 방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칠 년간의 질긴 악연을 오늘은 드디어, 끝낼 때가 되었다. (한페이지단편소설 투고작)

"어제 꿈을 꿨는데 말야..."
술이 불그레하게 오른 남자가 내 앞에서 자못 심각한 듯 말을 꺼낸다.
"내가 무슨 방 안에 있는 거야. 처음 보는 방인데, 창문도 없고 그냥 침대랑 TV만 덜렁 있는 거지. TV를 틀었더니 우리 와이프랑 딸내미가 나와서 재롱잔치 같은 걸 하는데... 내가 거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겠는 거야. 문은 철문이라서 나갈 수도 없고, 방 구석에 거의 요강 수준으로 작은 변기만 있고 말이지. 수도꼭지 하나가 있어서 그걸로 씻고 물도 먹고.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철문 아래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굉장한 거라도 나올듯 목소리를 낮춘다.
"짬뽕 한 그릇이 튀어나오는 거 있지. 그러고 깼어. 요새 짱깨 너무 많이 시켜먹었나봐."
잡. 았. 다.
이 순간을 나는 '입수'라고 부른다. 본인은 의식조차 못했겠지만, 방금 나는 그에게서 '씨앗'을 훔쳐냈다.
사람들은 누구든 씨앗들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로 발아할 수 있는 씨앗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발아에 적당한 온도와 습도, 양분과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그냥저냥 가지고 있다가 썩혀 버린다. 내가 하는 일은 그 씨앗들을 수집하는 것이다. 입수는 의외로 쉽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다. 물론 아무 이야기나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편린들, 감추고 싶은 것들, 스스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자아의 모습 안에 씨앗들은 숨어 있다.
남자라면 술 몇 병, 여자라면 달콤한 케익 따위를 잘 먹이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긴장히 풀린 그들은 '이건 사실 말 안할려고 했는데 말야...'라던가 '별 건 아닌데 왠지 요새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라면서 말문을 연다. 가만히 두어도 씨앗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내가 하는 것은 단지 그 순간, 씨앗을 잡아채는 것 뿐이다.
그렇게 모아둔 씨앗은, 내 고객들에게 아주 탐나는 상품이 된다. 그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소설가, 영화감독, 드라마 PD, 동화작가, 심지어 안무가에 가수까지 이야기가 필요한 사람들은 모두 나를 원한다. 넘치는 양분과 충분한 조건을 갖춘 그들은, 애저녁에 자기가 가진 씨앗 따위는 다 파내서 팔아먹은 지 오래다. 물론 작가라는 작자들은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나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백지 앞에서 석 달 열흘쯤 생고문을 당하고 나면 그들도 도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내게 도움을 청한다.
"정말 아무 것도 떠오르질 않아요. 도저히..."
하지만 나도 내키는 대로 적당히 내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무거나 마음대로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씨앗과 토양은 상성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선, 고객이 최근 몇 년간 만든 모든 작품들을 샅샅이 훑어본다. 그리고 그들의 현재 심경도 자세히 듣는다. 얼굴을 직접 맞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들의 표정, 그들의 몸짓, 그들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냄새와 향취, 촉감과 질감들을 남김없이 빨아들인다. 모든 정보가 수집되어 임계치를 넘는 순간, 그에게 가장 적합한 씨앗이 무언지 알게 된다.
"원래는 배우가 되고 싶으셨다구요?"
"네. 하지만 전 얼굴이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빽이 있지도 않고, 아무데서도 써 주지 않더군요."
벗겨진 머리, 구부정한 등, 불안한 듯 달달 떠는 다리... 아무리 봐준대도 호감가는 외모는 아니다. 그의 눈에 스치는 짙은 열등감의 그림자를 나는 놓치지 않는다.
"데뷔작은 소설이시던데... 평들이 상당히..."
"개새끼들! 작가가 못 되니까 비평이나 하는 주제에! 그땐 정말...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어요. 나보고 철학도 없는 얼간이에 불과하다나..."
"동화로 전향하신 뒤엔 꽤 명성을 얻었군요."
"하하. 애들이 듣는 동화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것들 투성이인 거에요. 뒷골목에선 굶어죽는 사람들 천진데, 무슨 요정에 공주는 배부른 소립니까! 그냥 제가 보고 느낀 걸 썼던 것 뿐이죠."
자만과 불안, 분노와 연민이 묘하게 뒤섞인 표정이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떠오른 순간, 그에게 가장 어울릴 씨앗 하나가 생각났다.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여자애 하나가 얼어 죽었답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루에도 수십 명은 얼어죽을걸."
"그 소녀는 행인들에게 뭘 팔고 있었다는군요."
"꽃이라도 팔았겠지."
"아닙니다. 성냥이죠."
"성냥을 팔다가 얼어죽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거, 그거야!"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인사도 하는둥마는둥 하고 문을 나선다. 아마도 오늘 밤 저이는 잠자는 것도 잊고 재게 손을 놀리리라.
나의 직업을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묻는다.
"왜 당신이 직접 작가가 되진 않는 겁니까?"
그러면 나는 그저 빙긋이 웃고 만다. 어쩌겠는가. 솔직히 말할까?
"저도 쓰고야 싶죠... 몸만 있으면."
살아있을 때 마음껏 쓰라. 보고 듣고 상상할 수 있을 때. 내가 당신에게서 씨앗을 훔쳐가기 전에.

붐비는 저녁 퇴근시간, 미어터지는 좌석버스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우리 둘은 똑같은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야말로 뭣 밟았다는 것.
십 년 만이었다.
"어... 너..."
차마 모르는 척은 할 수 없었으리라. 나도 그랬다. 오 분만 먼저 왔더라면 다른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으련만, 하필 그 날 버스에 남은 자리는 내 옆에 하나 뿐이었고, 사람들은 입구에서부터 밀려들었고, 그녀는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집까지는 사오 십분 남짓, 그것도 안 막히면 그랬다. 그 시간동안 우리는 꼼짝없이 함께 가야만 했다.
나란히 옆에 앉는 것도, 십 년만의 일이다. 우리는 그때도 이렇게 옆에 앉았다. 개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의 아침, 나란히 앉은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일 년의 유효기간을 가진 계약이 조용하게 성립되었다는 것을. 함께 도시락을 먹고, 서로 노트를 빌려주고, 같이 음악실에 가고, 조회시간에 둘씩 줄을 서려면 반드시 필요한 파트너를 구한 것이다.
"집에 가는 거니?"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도 그랬다. 먼저 말을 건 것도 나. 아쉬워서 잘해준 것도 나. 그녀의 빠른 걸음을 종종거리며 따라다니던 것도 나. 내 비밀을 숨기지 못하고 털어놔 버린 것도 나.
"그동안 잘 지냈어?"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틀어졌다. 새 짝을 먼저 구한 것은 나였고, 그 사실에서 가벼운 승리감마저 느꼈다. 그녀는 잠시 외로웠지만 이내 다른 그룹에 편입되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끝난 듯했다. 문제는 우리가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임원 회의, 모의고사 성적표, 환경미화, 심지어 음악 선생님의 사설 교실에서까지 그녀와 나의 이름은 항상 붙어다녔다. 그리고 찌는 듯 더운 여름, 모두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던 어느 오후의 교실에서 끝내는 사단이 났다.
<그러니까, 네 입장을 확실히 밝히란 말야. 애들도 다 너 재수없다고 한다구!>
<그거야 니 얘기겠지. 너네 엄마 첩인거 다른 애들도 다 알아!>
그녀는,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 그것도 사십육명의 귀 아흔 두개가 존재하는 곳에서. 아무리 내가 그녀의 소개로 만난 과외선생 덕분에 그녀를 앞질렀다 해도, 그녀가 외톨이로 지낸 며칠간 보란 듯 떠들썩하게 지냈다 하더라도,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무슨 대회 출전권을 빼앗아갔다 해도, 그건,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엄마는 잘 지내셔?"
역시, 그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너, 걔 그냥 용서해라.> 분에 못이겨 엉엉 울던 나에게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속도 없냐고 악악대는 날 보며 엄마는 그런 설움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빙긋이 웃었다. 엄마가 졸업식날 그애를 찾아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더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그녀의 머릿속에도 나와 비슷한, 그러나 다른 렌즈에서 바라본 기억들이 오갔으리라. 라디오에선 수다스런 DJ가 한가한 사람들의 사연을 못내 재밌다는 듯 읽어주고 있었다. 덜컹이는 차창 바깥에서는 불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바쁘다는 듯 흘러갔다. 우리 옆에 서있던 중년 남자는 사는 게 고되다는 듯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고개를 수그리고는 휘청거렸다.
하늘이 도우사 길은 안 막혔고, 버스 안내방송의 목소리는 우리 동네를 호명했고, 드디어 나는 내릴 수 있었다. 좁은 버스 좌석 사이로 그녀의 무릎을 넘어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가방끈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 나 먹으려고 산 건데, 가져가."
그녀는 검은 비닐봉지를 통째로 내밀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게 뭔지도 모르고 덥썩 받았다. 도망치듯 벨을 누르고 거의 점프하다시피 인도로 뛰어내렸다. 나를 토해낸 버스는 망설임없이 떠났고, 겨우 그 숨막히는 자리에서 벗어난 나는 심호흡하듯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몇 걸음을 걷고서야 비로소 내 손에 들린 묵직한 봉지의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노란, 노오란 바나나 한 다발. 부채처럼 펼쳐진 그 모양이 꼭 <미안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걸으며, 바나나 한 송이를 뜯어 먹었다. 풋내와 함께 달큰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십 년 묵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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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신작의 성과가 재개장일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나요?
이번 건 스타일이 달라서인지 덧글이 없어 궁금...
잘 읽었어요. '뜨거운 대기', '차가운 뱃속에 아지랑이'라는 표현들 유니크하고 인상적이에요. 오싹오싹하면서 감동적이네요. 좋은 글 선물해주셔서 감사해요.
최근에 읽었던 보네거트의 소설 'Bluebeard'에 보니까, '작가는 독자 한 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할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사실 그거 비밀인데(...)
저는 한 편을 쓸 때마다 그전에는 안해봤던 것을 시도해보고 싶어해요. 안 그러면 저 스스로가 재미가 없거든요. 그걸 저 혼자는 '과제'라고 하는데, 이번 단편에는 과제가 꽤 많았어요. 3인칭, 보네거트식의 시간교차 플롯, 풍경의 묘사, 주인공의 침묵, 인물들의 행동 묘사에 비환상성까지. 에구구구구.
(사건과 기승전결이 명확한) '본격창작'으로 들어선 뒤에 안 환상적인 소설은 처음 써보는데, 이게 참 어렵더군요. 안 환상적이면서 몰입을 유도하거나 소설적인 반전을 꾀하려고 하니까...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아져서말이죠. 자꾸 환상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쓰고보니까 환상적이든 안 환상적이든 소설이 된 이상은 같은 종류의 '구라'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 딱 꼬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다만 순문학의 이상한 장르(네... 그건 장르입니다)적 규칙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건 어떨까 했던 건데, 문제는 SF라는 장르 자체가 서구에서 탄생한 것인 만큼 그 장르의 규칙 자체가 뭔가... 안 맞아요. 단편 SF의 최고봉이라고 할만한 테드창을 읽어봐도, 잘 썼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정신세계에 매혹되지는 않아요.
요는 제가 하고 싶은 게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건데... 그래서 이것도 그 징검다리 중의 하나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