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론에 대한 책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책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시작한다. 굳이 말하자면
스티븐킹의
유혹하는글쓰기에서 작가의 어린시절과 창작인생을 서술한 부분과 조금 유사한 데가 있다. 즉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보다는 작가 자신이 '나는 이렇게 썼고, 쓰고 있다'고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발상을 어떻게 얻는지, 문장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있지가 않다. 대신 소설이란 무엇이며, 소설의 시대정신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해서 나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그렇다. 처음으로...) '소설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며칠간 골똘이 생각해보았다. 앞으로도 계속 생각할 것 같다. '의문'을 던져주는, 매우 훌륭한 책.
다만 저자 개인의 개성이 담뿍 묻어 있으므로, 100% 다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방색을 활용하라'라던가 '펜으로 쓰라'는 충고 같은 것은 선택적으로 취사할 수 있을 듯. 20090605
| 어떤 사람이 한 말에는 그 사람 나름의 개성과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즉, 나한테는 '숨을 쉬는 것'이지만, A한테는 '본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고, B한테는 '음악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들어맞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는 것'은 먼저 타인의 말을 자신의 말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p16~17 |
| 며칠 전에 나는 어떤 현대 조각 전시회를 관람했다. 처음 보았을 때의 솔직한 느낌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에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내 방식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예술과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흔히 그 제작자에게 의도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예술(소설)은 이미 예술(소설)이 아니다.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소설)은 예술(소설)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일상이 예술(소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소설)이 일상을 비추는 것이다. p18 |
| '재미있는 소설'에 대한 찬사로 흔히 '단숨에 읽힌다'는 말이 쓰인다. 그러나 단숨에 읽힌다는 것이 찬사가 될 수는 없다. 단숨에 읽히는 소설은 이미 있는 재미,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재미에 초점을 맞추어 씌어진 소설이다. 이런 소설의 재미는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재미가 아니다. 게다가 '단숨에 읽힌다'는 것은 독자가 그 소설 속의 세계에서 빨리 벗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독자가 그렇게 빨리 그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p20 |
| 197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소설이라는 것이 이미 역사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정체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조숙한 사람은 그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졸라나 발자크가 활동했던 소설의 전성시대에는 소설에서 무엇을 써야 하느냐 외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소설에서는 무엇이 가능한가?'라든가 '도대체 소설이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p23 |
| '소설을 쓰기 위한 매뉴얼'에는 '지문과 대사의 비율'이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의 관계를 설정하는 법' 아니면 '비유의 사용법' '회상을 삽입하는 방법' '사건의 복선을 까는 방법' 등 여러 가지 테크닉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런 성공 사례는 하나하나가 이미 소설이 되어 나와 있기 때문에 성공 사례로 보일 뿐이다. 이런 성공 사례를 사용한다고 해서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것이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역逆은 성립하지 않는다.' p29 |
| 인간의 능력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최초의 작품 하나에 전력을 기울인 사람에게는 두 번째가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작품을 쓰면서 힘을 아끼거나 두 번째 작품을 위해 쓸거리를 남겨둔 사람에게는 두 번째 작품은커녕 첫 번째 작품도 없다. p35 |
|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신인상이나 무슨 문학상을 받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아무리 소설이 많이 팔리거나 상을 받는다고 해도, 한 작품을 쓸 때마다 자신의 수준을 높여간다는 성취감이 없으면 소설을 쓰는 의미가 없다. 자신의 수준을 높여가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 어려움을 아는 것은 또한 기쁨이기도 하다. p39 |
| 지금까지는 우울한 인생을 보내고 있던 사람이 소설을 씀으로써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지만, 이것은 소설을 왜소화하는 이야기이다. 소설이란 좀더 커다란 무엇인가를 향해 가는 것이지, 그 소설을 쓴 사람 하나밖에 구원하지 못하는 빈약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설을 씀으로써 '자아 실현'이나 '자기 구원'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된다. 이래서는 일생 동안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소설가가 될 수 없다. p40 |
| 음악이든 소설이든, 표현이란 끊임없이 무언가 일탈하는 것을 품고 있지 않으면 머지않아 소멸되어 버린다. 표현이란 본질적으로 그런 것이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재즈에 활기가 있었던 것은 재즈가 끊임없이 일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녹음된 재즈 음반은 일탈하는 정신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들어도 재즈로 들린다. 하지만 요즘 1960년대 스타일로 연주하는 재즈를 들어보면 거기에는 일탈하는 정신이 없기 때문에 재즈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 또한 기성 소설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품고 있지 않는 한 지금 씌어져야 할 의미가 없다. p43~44 |
| 소설을 쓰려고 하는 것이니까 소설만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만 단정하면 곧바로 벽에 부딪히고 만다. 소설은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 표현 형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소설에 대해 저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럴 경우 계속해서 소설 이외의 것에 심취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다. 소설 이외의 것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앞으로 쓰려고 하는 소설'과 호흡흘 맞추게 될 것이다. p45 |
|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철학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철학은 해답을 찾기 위해 논리적으로 따지는 학문'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철학 서적에는 '해답'이 적혀 있지 않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낙심하여 철학 서적은 이제 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철학 서적을 읽는 데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설을 쓰는 데도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이라는 표현 형식 또한 철학과 마찬가지로 '해답'을 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소설의 해답은 최초의 일행에서부터 최후의 일행에 이르기까지 전체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p54 |
| 소설 작품 하나하나는 쓰는 사람 자신이 성장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쏟아넣을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렇게 마음을 먹고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주제'라는 틀의 설정은 작품을 완성하는 데는 편리하겠지만, 쓰는 사람의 사고나 감수성이나 기억의 발로에 제한을 가해버린다는 점에서 커다란 마이너스가 된다. p69 |
| '쓸쓸한 겨울 거리를 휩쓸고, 지나는 바람이 내 마음에도 불어왔다'와 같이 비유를 사용한 구절에는 '문학적인 분위기'는 있어도 결코 '문학'은 아니다. 이러한 '문학적인 분위기', 곧 수사나 장식을 모두 제거하더라도 역시 뭔가 남는 것이 '문학'이다. p72 |
| 쓰기 어려운 것을 쓰는 것은 분명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설가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생각을 많이 함으로써 실력도 확실히 좋아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력'이란 단순한 '기술'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쓰려고 하는 것이 생각대로 씌어지지 않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쓰기 어려운 것'을 참을성 있게 쓰는 과정에서 소설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다...(중략)...그 때문에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소설에의 '변경邊境'을 발견하는 것이라도고 할 수 있다. p77~78 |
| 두뇌과학에 의해 설명되는 인간의 구조, 그리고 '마음의 발생'과 같이 가장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것이 전혀 해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소설로 씌어져야 할 제재는 이 '평범하다는 것의 불가사의함'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p83 |
| 하찮은 인간만 나오는 하찮은 소설은 읽고 있어도 독자가 고양감이나 해방감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테크닉 이전의, 어쩌면 사상의 범주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보아도 좋다. 소설가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하며 그 사람의 결점에서 전향적인 지향성이나 인생의 어느 고비 또는 기로에서 길을 잘못 들어버린 그 사람 본래의 가능성을 헤아리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p96~97 |
| 내 소설의 등장인물은 약간의 각색을 거치기는 하지만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실재 인물을 모델로 삼는 이유는 '실제로 이러한 인간이 있다'라는 사실이 소설을 써나갈 때에 강력한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실제로 이런 일을 하는 인간이 있다,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내 안에서 강한 확신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데도 크게 영향을 준다. 이 말은, 모델이 된 인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모습 등을 세밀하고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실재하는 인물을 모델로 삼았을 경우, 그 인물에 대해 간단히 나타내더라도 그 인물의 느낌 같은 것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된다는 뜻이다. p100~101 |
| 많은 인물을 역할에 따라 배치하지 않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할지 사전에 결정하지 않은 채 써감으로써 작가인 '나'에 대한 느낌 또한 달라진다. 자아가 희박해진다고 할까, 좀더 개방적으로 된다고 할까. 지금까지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렇지만도 않은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어쨌든 그 느낌은 실제로 써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확실히 '내'가 달라진다. p118 |
| 통로란 소설을 통해 쓰는 사람이 호소하고 싶은 주제, 메시지, 강렬한 심정보다 더 앞선다. 호소하고 싶은 것, 느껴주었으면 하는 것 등은 이 통로가 열려 있지 않으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독자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소설의 이상적인 형태는 쓰는 사람이 소설 속에서 하나하나 쌓아가는 과정과 동일한 과정을 독자 또한 밟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엇은 "이렇게 과정을 밟으시기 바랍니다"라고 원하는 것만으로는 무리가 있다. (선생님이 "잘 들어!"하고 말로만 해서는 학생이 잘 듣지 않는 것처럼) 작가는 독자가 소설과 공감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만 한다. '통로를 연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이다. p123 |
| 소설이란 자아가 쓰는 것이 아니다(그것이 출발점이라고 해도). 소설이 그때까지 창출한 흐름(운동)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흐름에 따라 쌓여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이 변경되거나 사전에 없었던 이미지가 나타나면 그것은 소설로서의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므로 오히려 즐거워해야 한다. p124 |
| 작가는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단련된다. 끈기가 생기고, 끈기가 생김으로써 인물에 대한 기술이나 전체적인 전개 또한 형식적인 흐름과 타협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막다른 곳에 부딪혀서도 버텨내며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쓸 수 있게 된다. 소설가가 소설을 씀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상황을 대충 때우려 하지 않고 거기에서 버텨내기 때문이다. p140 |
| 이야기란 밤중에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구전되어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즉, 이야기란 귀로 듣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이에 반해 소설이란 독자 혼자서 눈으로 읽는 것으로서 발달해 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독한 시간 속에서 천천히 눈으로 읽어감으로써 문자로 씌어진 복잡한 공간적 서술과 시간적 서술이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몇 겹씩 쌓이거나 내부에 겹쳐지는 과정 그 자체가 소설이라는 표현 형태인 것이다. p150~151 |
|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줄거리를 간추릴 수 있는 것이 소설(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소설이란 읽고 있는 시간에만 존재한다. 읽으면서 여러가지 것들을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이 소설이다. 여기서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은 그 작품에 씌어져 있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도 포함된다. 즉, 읽는 사람의 실제 인생과 관련이 있는 여러가지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소설이다. 그 때문에 작가는 세부적인 것에 힘을 기울인다. 소설에 대해 이런 생각과 태도를 지니는 것은 구체적인 기법을 배우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p151 |
| 차창 밖의 경치늘 즐겁게 구경하는 동안에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된다. 그림을 그리거나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들은 원래 수작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뭔가를 제작한다는 행위는 완성품의 모습을 머릿속에 미리 그려놓고, 오로지 그 완성품을 목표로 작업만 계속해나가면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작하고 있는 작품에 늘 주의를 기울이고 실제로 만들어지는 정도나 그것이 주는 느낌에 따라서 '완성'은 그때그때 모양을 달리해 간다...(중략)...제작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이나 기쁨을 발견할 수 없으면 작품을 완성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작품의 완성'이란 제작 과정 그 자체다. p170~171 |
| 감상적인 소설이나 스토리 위주로 씌어진 소설은 오로지 심각한 이야기만 담겨 있는 수기와 마찬가지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독자가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p212 |
| 감상적인 이야기는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죽은 시점에서부터 그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본 다음 '그때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달콤하게 맛보는 짜임새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 방관자적인 태도가 죄악이다. 당사자로서 자신이 사건 속에 관련되어 있다면 그 사건이 끝나더라도 사건의 부조리함에 계속해서 화를 내거나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이런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하고 이리저리 생각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감상적인 글쓰기 방식은 아직까지 정리가 안 된 마음을 전부 아름다운 말로 승화시켜 버린다...(중략)...이것은 리얼리티라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리얼리티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이클 속에 작가가 말려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생겨난다. 즉, 글을 쓰는 감정이나 사고를 단색으로 칠하지 않음으로써 글이 현실과 연락을 취하고 거기에서 리얼리티가 생겨난다. 감상적인 소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되면 더 좋기 때문에 표면적인 테크닉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다. 소설에 현실을 들여온다면 그 소설은 절대로 감상적이 될 수 없다. p214~215 |
| 소설가에게는 뛰어난 소설을 읽는 것이 큰 기쁨 가운데 하나다. 뛰어난 소설을 쓰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많아지는 것을 소설가들은 늘 바라고 있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꼭 기억해두기 바란다. p2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