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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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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 - 9점
칼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신화적 상징에 대해 서술한 2장을 제외한다면, 정신분석학과 상징을 이해하는 데 이만한 입문서가 없다. (미국의 융파 학자인 조셉 핸더슨이 쓴 2장의 이야기들은 내가 싫어하는 정신분석학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공포는 그의 어머니가 어렸을 때 억압적인 양육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와 같은. 무언가 '납득할 수 없다'는 감정을 마구마구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가 쓴 3부, '개성화의 과정'에 서술된 자기self에 대한 부분은 가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필독. 200704

2009년 11월에 그은 밑줄 #

융 학파 학자들에게 꿈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 의미를 풀어낸 어휘표로 해독될 수 있는 모종의 표준화된 암호체계가 아니라 개인의 무의식에 관한 총체적이고 중요한 사적 표현이다. 꿈은 개인에게 딸린 다른 현상이나 마찬가지로 절실한 <현실>이다. 꿈꾸는 사람의 무의식은 바로 그 사람 개인을 상대로만 교신하는 것이며,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 꿈꾸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는 상징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융 파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꿈의 해석은 그것이 분석가에 의한 것이든 꿈꾼 당사자에 의한 것이든 대단히 사적이고 개성적인 것(그리고 실험적이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주먹구구로 함부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10~11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전적으로 의식적인 세계에서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무의식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극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삶의 법칙으로 자신들을 속박한다....(중략)... 그들은 이렇게 얻은 결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의 공동 집필자들은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법으로 스스로를 제약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논리를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고, 이들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에 따라서도 토론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초점이 정확한 삼단논법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춤으로써 독자들을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회하고 반복하고 그럴 때마다 조금 각도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그러면 독자들은 이들의 논리가 결정적으로 증명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대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결론보다 훨씬 큰 진실의 품속에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p11~12


많은 미개인들은, 인간에게는 인간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초원의 영혼bush soul>도 깃들여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들은 야생동물이나 숲속의 나무로 구체화되는 이 초원의 영혼에게 일종의 심리적 동일성을 느낀다...(중략)...미개종족 중에는, 사람에게는 여러 개의 영혼이 있다고 믿는 종족이 있는가 하면, 자기네들이 여러 개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몇 개의 영혼으로부터 독립된 개체로 성립되었다고 믿는 종족도 있다. 동일시의 문제는 이런 종족의 믿음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개인의 마음이라는 것이 안전하게 결함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역동성 앞에서는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미개인들의 믿음을 읽을 수 있다. p24~25


금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프로이트와 요젭 브로이어Jeseph Breuer는 이미 신경증의 증상(히스테리, 모종의 고통체험, 기이한 행동)이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들에 따르면, 신경증의 증상은 꿈속에서 그렇듯이 무의식이 그 자체를 표명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꿈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가령 참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어떤 환자는 음식물을 삼키려 할 때마다 심한 경련성 발작을 일으킨다. 결국 그에게, <그 음식물은 삼킬 수 없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억압을 받는 같은 상황에서 천식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도 있다. 그는 결국 <편안하게 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는 것>이다. 하체마비 증상을 일으키는 환자도 있는데, 이 환자는 걸을 수 없고, 그래서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인용할 수 있다. 이같은 신체적 반응은 무의식적으로 고심하고 있던 문제의 자기표명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p26~27


인류학자들이 <쇄신공포증>이라고 부르는 것, 미개인들이 새로운 것에서 느끼는 미신적인 공포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거니와, 미개인들은 적응하기 어려운 사건을 만나면 야생동물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는 <문명인>도,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는 거의 같은 식으로 반응하고, 새로운 것을 직면하는 데서 오는 충격으로부터 자기자신을 지키기 위해 심리적인 방벽을 쌓는다. 이것은, 꿈으로 통해서 나타난 중요한 사실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경우 꿈을 꾼 사람이 보이는 반응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철학, 과학, 심지어는 문학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구자들은 그시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쇄신공포증의 희생제물이 되어 왔다. p31


신경증 환자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실제로는 엉뚱한 짓을 하는데도 그 자신은 마치 무슨 짓을 하는지 의식하면서 목적이 분명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사해 보면 그가 전혀 무의식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는지, 아니면 딴생각을 하면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신경증 환자는 듣고 있지만 듣는 것이 아니고, 보고 있지만 보는 것이 아니며,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무지한 것이다. 이런 예는 아주 흔하다. 전문가들의 조사를 통하여 무의식적인 마음의 내용이 환자로 하여금 의식적인 것처럼 행동하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 낸다. p33


그러나 깨어 있을 때 우리가 다루는 관념은 언뜻 보면 정확하고 잘 통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 정확한 것도, 잘 통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중략)...우리가 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고, 우리가 의지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조차 회상될 때마다 무의식의 바탕색깔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자주 있다. 바로 이 바탕색깔이 회상되는 관념을 채색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의 의식적인 인상은 심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무의식의 의미 요소를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잠재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잠재적 의미가 어떻게 일상적인 의미를 확장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p39~40


사람은 누구나 추상적인, 혹은 일반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되 자기가 처한 특수한 심리상황에서 이것을 받아들이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이해하고, 자기 삶에 적용시킨다. 가령 대화 중에 <지위>, <재물>, <건강>, <사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 역시 자기가 이해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이런 말을 이해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라는 표현이다. 말이라는 것은 문화적인 배경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약간씩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까닭은, 일반적인 개념은 듣는 사람의 개인적인 문맥에서 받아들여지고 다소간은 개인적인 양식으로 이해되고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심리적 체험이 서로 다를 경우 이 이미의 차이는 더욱 커진다. p40


...이 꿈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꿈이 그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은유적인 방법을 써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까닭은 무엇일까? 꿈이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바꾸어 버리기 때문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감정이 담겨 있는 회화적인 언어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에서 어떤 사실을 되도록이면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언어에서든 사고에서든 공상적인 요소는 버려야 한다고 배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원시적 심성의 특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상실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이 지니고 있는 공상적, 심리적 연상은 모두 무의식에게만 맡기고 있다. 그러나 원시인들은 아직도 이같은 심리적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동식물이나 여느 돌이나 바위에,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영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p43,45


무의식으로부터 날아오는 이같은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적인 삶은 모든 종류의 영향력에 깡그리 노출되어 있다. 타인의 삶의 양식은 우리를 자극하기도 하고 우울하게 하기도 하며, 직장이나 모듬살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우리를 혼란에 빠드리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의 개성과는 상관없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러한 경향을 외적인 대상에 집착하는, 말하자면 외향적인 태도로 사물을 보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내적인 인격을 의심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의식이 편견이나 오류나 공상, 그리고 유아적인 욕구에 훼손되면 될수록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는 자꾸만 벌어져 결국은 신경증적 해리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삶이 부자연스러워지고 필경은 건강한 본능과 자연과 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게 된다 p49~50


되풀이해서 꾸게 되는 꿈은 한번쯤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현상이다. 가령,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같은 꿈을 되풀이해서 꾸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꿈은 꿈꾼 사람의 생활태도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 무의식이 그 결함을 보상하기 위해서 보내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마음에 어떤 편견을 남길 만한 정신적인 외상trauma을 체험하는 순간부터 이런 꿈을 꾸게 되는 수도 있다. p53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그 개인에서 분리되어 인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향하면 향할수록 우리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요즘 같은 사회적 동란과 변화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개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무 많은 것들이 개인의 정신적, 혹은 도덕적 자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른 눈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현재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화나 상징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p58


실제로 무의식에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실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듯하다. 무의식의 어떤 사실을 응용할 수도 있고, 그 응용의 결과를 예측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기능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꿈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이미지를 산출한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논리적인 분석은 의식의 특권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지식을 이용해서 사물을 선별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주로 본능적 경향에 따라 작동하는 듯하다. 이 경향은 여기에 상응하는 사고형태, 즉 원형의 문법에 따라 표현된다. 어떤 병의 경과를 기록할 경우 의사는 <감염>이라든지, <열>이라든지 하는 합리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꿈은 시적이다. 꿈에서는 병든 몸은 인간이 사는 금생의 집으로, 열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p78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은 현대인의 미신이다. 그러나 이 신조를 유지하느라고 현대인은 내성(內省)을 돌보지 못하다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합리적으로 움직이고 능률적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엄청난 어떤 <힘>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신이나 악마는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신이나 악마는 현대인들에게, 하루도 가실 날이 없는 막연한 불안이나 심리적인 갈등, 약물, 알코올, 담배, 먹을 것에 대한 끝없는 욕구(그리고 무엇보다도 갖가지 신경증)로 나타나고 있다. p82


이른바 문명화된 의식은 그 의식의 바탕이 되는 본능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 본능은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다. 본능은 우리 의식과 접촉할 수단을 잃고 이제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본능의 드러남은 생리적인 증상,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분의 경험, 문득문득 찾아오는 망연자실한 순간, 뜻밖의 말 실수 등의 돌발사태로 나타난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영혼의 주인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기의 기분이나 정서를 제어할 수 없는 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의 계획이나 결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은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 p83


자,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로 보자. 개인은 무의식의 힘에 따라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인류도 거대한 무의식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인류 역시 자신의 문제를 분리된 서랍에 넣어 두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주의깊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인류는 지금 인류 자신의 손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만큼 엄청난 크기로 자라, 자신이 만들어낸 가공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인류의 세계는 신경증 환자의 정신처럼 분열되어 있는데 <철의 장막>은 바로 이쪽과 저쪽 사아에 있는 상징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다. p85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산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중략)...그들의 신화는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왔던, 황금시대(낙원)을 겨냥하는 원형적인 꿈이다. 형태는 유치하지만 설득력은 대단히 강한 이 신화가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 황금시대가 오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물건이 넉넉하게 돌아가게 되고, 위대한 우두머리가 나타나 공명정대하게 이 유치원 같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그들보다 월등하다고 해도 이 신화를 세상에서 절대로 없애 버릴 수는 없다. 신화를 없애겠다는 시도는 신화를 강화시킬 뿐이다. 우리 서방 문화 역시 같은 신화에 사로잡힌 채 무의식적으로 같은 편견이나 희망이나 기대를 키워나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아직도 복지국가를 믿고, 세계의 평화, 인간의 평등, 항구적인 인간의 권리, 그리고 비록 큰소리로 떠들어대지는 않으나 <지상 하느님의 왕국>이 오리라는 것까지 믿고 있다. p85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 상징들이 맡고 있는 일몫이다. 푸에블로 인디언은 스스로를 <아버지 태양>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은 그들의 존재를 한정된 존재에서 넘어서게 하고, 삶에 대단한 시야(그리고 목표)를 제공한다. 바로 이 믿음이 그들에게 마음껏 자기 인격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한살이를 살게 해준다. 그런데 우리 문명인은 어떤가? 문명인은 자기야말로 아무런 내적 의미도 없는 인생을 사는 열등한 존재,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에게 견주어 푸에블로 인디언은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p89


상징을 해석하려고 할 때, 우리는 상징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상징을 산출한 당사자의 전체성과도 대결해야 한다. 이 대결에는 당사자의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는데, 바로 이런 연구가 있어야 해석자는 교육과정에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빈틈을 메워갈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례를 대할 때마다 그 사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러니까 전혀 새로운 상태에서 시작한다. p92


이 문화적 상징이 다소 황당하게 보인다고 해서 일축해 버려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심리학자가 있다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문화적 상징은 우리 정신구조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고, 인간의 모듬살이를 가동시키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심각한 손실을 감수하지 않는 한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억압당하거나 무시당하면 이 문화적 상징이 지닌 특유의 에너지는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이렇게 된 뒤에 이것이 의식으로 다시 떠오르면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일을 저지른다. 사라져 버린 것같이 보이던 이 정신적 에너지가 사실은 무의식의 상위계층(지금까지 의식으로 떠오르지 못했거나, 의식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괴상한 존재로 침전되어 있는 것들)을 무차별 변용시키거나 강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p93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있던 <그림자>(우리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잠재적인 파괴력을 지닌)가 일어나 우리의 의식과 맞선다. 어떠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는 경향도, 일단 억압을 받으면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악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을, 심리학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하세계의 문을 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금세기 초두의 목가적인 평화시대에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도덕적인 사건이 우리 세계를 엎어놓지 않았던가. 그 이래로 우리 세계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명국이었던 독일만이 무서운 마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러시아 또한 그 증세를 보였으며, 아프리카는 불길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서방세계가 불안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p93


문화인류학자들은 현대문명의 충격에 노출될 때 미개인의 사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문명에 노출될 경우 미개인들은 자기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들의 조직사회는 붕괴되며, 결국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불행히도 상징이 보여주는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자기 조직을 보호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는, 신앙(인간이 지닌 가장 강한 무기)은 절대로 사고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신앙인들은 과학을 두려워한 나머지(심리학도 두려워한 나머지) 인간이 지배하는 영원한 진리인 정신적 신성력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우리에게 누미노스(신성한 힘)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제 거룩한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p94


과학적인 이해가 발달함에 따라 우리들의 세계는 끊임없는 비인간화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우주에서 고립되었다고 느낀다. 이렇게 느끼는 까닭은,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관여하고 있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 현상 사이의 <무의식적 동일성unconscious identity>을 상실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연현상은 서서히 그 은밀한 의미를 상실했다. 천둥은 더 이상 진노한 신의 음성이 아니고 번개는 더 이상 징벌의 화살이 아니다. 강에는 이제 요정이 없고, 나무는 더 이상 인간생명의 원리가 아니고, 뱀은 지혜의 구현자가 아니고, 산의 동굴은 귀신의 집이 아닌 것이다. 이미 돌이나 동물이나 식물은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인간 역시 이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 뿐더러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은 끝났다. 이 교감이 끝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이 상징적 인연이 공급해 온 심오한 정동적 에너지 또한 사라져 버린 것이다. p95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표면에서 모든 미신적 요소, 비합리적 요소가 깨끗이 청소되어 버린 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지니던 진정한(우리의 원망충족을 위한 허구가 아닌) 내적 세계도 그렇게 원시성에서 완전하게 해방된 것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13이라는 숫자는 아직까지도 터부가 되고 있지 않는가? 비합리적인 편견, 터무니없는 자기투사에서도 해방되었는가? 그래서 유치한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이제는 없어진 것인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사실적으로 찍어낸 사진(꿈)을 보면 여전히 원시적인 경향이나 고대의 잔재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러한 경향과 잔재가 지난 5백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스란히 기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감히 원시성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p96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의 일부인 원시적 특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꿈의 상징이 항상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 특성이다. 무의식은 마음이 그 발전도상에서 버렸던 온갖 옛것들(환각, 공상, 구태의연한 사고형태, 기본적인 본능 따위)을 되찾으려고 하는 듯하다. 사람들이 무의식인 것에 접근할 때 저항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무의식이 되찾으려고 하는 것,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과 저항을 느끼는 이 잔재는 중성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관심을 전혀 표명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내용물은 상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잔재에 대해 불쾌감, 심지어는 공포를 느끼기까지 한다. 바로 이러한 잔재는,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신경증의 형태로 개인의 전인격 속으로 퍼져들어간다. p98


심리학은 가치요인(곧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 유일한 과학이다.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감정이 곧 마음의 현상과 생명을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심리학은 종종 과학적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비난하는 것은, 감정도 고려해야 한다는 과학적이고 실제적인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99


지금 인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성>의 여신이지만 사실은 이 이성의 여신이라는 존재야말로 인간의 비극적인 착각이 만들어 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성의 도움으로 <자연을 정복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구호에 지나지 못한다. 인구과잉이라는 자연적인 사실이 자연을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인류를 압도하고 있지 않은가. 인구조절에 대한 인류의 심리적 무능이 인류가 처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찌 않은가. 인류는 아직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우세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이렇게 자연 그대로인데 어떻게 자연을 정복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p101


무엇인가 어떻게든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고 전파하게 되는 것은 결국 개인이다. 그래서 변화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로부터 시작되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이 시작해 줄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무의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들의 의식이 이 점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충고를 해주지 못할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인류는 오늘날, 위대한 종교도 다양한 철학도, 이 세계의 모습을 직시하는데 필요한 강력하고 생생한 관념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p101


인류가 에너지라는 에너지는 모두 자연의 탐구에 쏟아 넣었던 시대에도 인간의 본질연구에는 정말 아무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의식의 작용에 관한 연구는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상징을 산출하는 이 복잡하고 생소한 부문에 대한 탐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아도 좋다. 밤마다 이 무의식이 보내오는 신호를 감청하고, 그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해독하는 일은 어렵고도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믿어지지 않으리 만치 적다. 인간이 지닌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음이 너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믿음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심하게도 <심리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p102


이 꿈에 따르면 부인은 자기 또래의 젊은 여성들과 함께 줄을 서 있다. 줄 한가운데서 이 부인은 앞쪽을 본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차례로 단두대에서 목을 잘리고 있다! 그런데도 부인은 아무 공포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그대로 대열에 머물러 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인에게, <머리로 사는> 습관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리고는 육체의 자연스러운 성적 반응을 인정하고 모성이라는 생물학적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육체를 해방시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중략)...나는 그 뒤에 이 부인이 자기의 애정생활을 새롭게 개선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자기자신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되자 이 부인은, 남성(또는 남성적으로 훈련된 여성)의 인생이란 영욱적인 의지로 돌격하고 돌파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만 여성의 인생은 자각의 과정을 통해서 미덕을 발견하고 그 미덕을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p137


2007년 4월에 그은 밑줄 #

괴테의 '파우스트'는 적절하게도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행위'는 결코 발명된 것이 아니라 행해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한다는 행동은, 비교적 뒷사람들이 발견한 행동양식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선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게 한 원인을 반성하기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의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기자신뿐이라는 어마어마한 생각'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은 자기자신이 부여한 힘이지 결코 다른 누구의 힘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p81

...이같은 내적인 행동동기는 우리 심층에 있는 심원한 원천에서 비롯된다. 이 원천은 의식이 만든 것도, 의식의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다. 고대신화에서는 이 힘을 마나mana, 정령, 악마, 혹은 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힘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존재하면서 활동한다. 이 힘이 우리의 의식과 일치할 경우 우리는 이 힘을 대단한 예감, 혹은 충동이라고 부르면서 예감과 충동의 주체인 자신의 현명함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 힘이 우리와는 반대되는 작용을 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든가, 자신의 불행이 병적인 성향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가 제어할 수 없는 이(힘)의 존재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p82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영혼의 주인이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기의 기분이나 정서를 제어할 수 없는 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의 계획이나 결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은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식적 요인이 생기는 것은 원형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칸막이 체계system of compartment 로 자신을 가두고는 자기의 분열상태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까 외부생활과 자신의 행동영역을 각각 다른 서랍에 넣어 놓고 서로 대면시키지 않는 것이다. p83

자기 존재에 대단한 의미가 있다는 느낌은, 한 인간을 단순히 소유하고 소비하는 존재로부터 보다 나은 존재로 도약하게 한다. 그런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인식한다. p89

사람들은, 상상력과 직관력은 예술가들에게나 필요한 것, 따라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는 믿지 말아야 할 것인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고도로 정밀해야 하는 과학에서도 이 상상력과 직관력은 빠져서는 안된다. 고도로 정밀해야 하는 과학일수록 상상력과 직관력은 합리적인 지성이나, 특정 문게에 대한 지성의 적용을 보조하는 것으로 중요한 몫을 한다. 응용과학 가운데서 가장 엄밀한 물리학조차 무의식의 작용에 따른 이 직관에 놀라울 정도로 의지하고 있다. (나중에 논리적 과정이 직관과 동일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p92

문화인류학자들은 현대문명의 충격에 노출될 때 미개인의 사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문명에 노출될 경우 미개인은 자기네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들의 조직사회는 붕괴되며, 결국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상실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불행히도 상징이 보여주는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자기 조직을 보호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는, 신앙(인간이 지닌 가장 강한 무기)은 절대로 사고(思考)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신앙인들은 과학을 두려워한 나머지(심리학도 두려워한 나머지) 인간을 지배하는 영원한 진리인 정신적 신성력으로부터는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우리에게 누미노스(신성한 힘)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제 거룩한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p94

<자아>는 본래 임의의 욕구를 산출하고 그 욕구에 따르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전체성(全體性)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듯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모든 체계를 밝힘으로써 <자기self>로 하여금 그것을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곧 <자아>인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아>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이 재능은 나의 <자아>가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현실화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래적인 것일뿐, 사람의 마음에 잠재해 있는 마음의 전체성은 완전히 자각되고, 완전히 실천된 전체성과는 다른 것이다. p162

친구로부터 결점을 지적당하고 마음속으로 심한 분노를 경험할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친구의 지적을 통해서, 그때까지 전혀 의식해 본 적이 없는 그림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별로 잘나지도 못한 자>로부터 그림자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니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의 꿈(자기의 존재 안에 있는 내적인 비판기능)으로부터 그런 지적을 당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사자는 그 순간 자기 자아의 모습을 알아내고는 당혹한 나머지 침묵을 지킬 것이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바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자기 교육의 과정이 시작된다. p168

자기 자신의 무의식적인 경향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을 <투사>라고 부른다. 모든 나라의 정치적 선동은 작은 무리나 개인들 사이의 쑥덕공론과 마찬가지로 온통 이런 투사행위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종류의 투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객관성을 무너뜨림으로써 진정한 인간관계의 모든 가능성을 저해한다. p172

무의식의 발견은 현대의 가장 괄목할 만한 대발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활에 대한 성실한 검증이나 재통합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기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하기야 무의식을 진지하게 다루고 무의식이 야기시키는 문제와 맞서자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p176

이 인격화한 무의식 중 한 가지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경우, 우리는 불행히도 우리들 자신의 그런 생각과 감정의 주체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런 생각과 감정이 무의식의 장난인 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중략)...어떤 사람이 무의식중에 행동이나 엉뚱한 말을 했음을 깨닫고 두려움과 후회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만 가능하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기가 자기 것일 수 없는 이상한 심리적 요인의 먹이가 되고 말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p193

아니무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진취적인 정신, 용기, 진실, 그리고 지고한 차원의 영성으로 화신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아니무스와 만날 경우 여성은 자신의 문화적, 개인적 상황의 저변에 깔린 여러 경향을 체험할 수 있을 뿐더러 한층 강화된 의미에서의 영적인 삶의 길을 찾는 것도 가능해진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의 아니무스가 비판을 초월한 의견을 제시한다고 믿을 때만 가능하다. 여성은 자신의 믿음은 물론이고, 신성한 확신조차도 의심할 수 있는 용기와 내적인 마음의 넓이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p195

실제적인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인간존재라고 하는 것은 개개의 본능, 배고픔, 권력, 성, 적자생존, 종의 보존과 같은 일정한 목적에 부합되는 메커니즘 내에서는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인간의 주된 목적은 먹는 것, 혹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적 심리현실은 이러한 욕구를 초월해 살아 있는 신비를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상징을 통한 표현이다. p202

...다시 말하면 가만히 있어도 개인은 때가 되면 이 <위대한 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를 향한 자아의 외향성을 완전히 극복할 때만 <우주적 인간>을 향한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자아의 외향성을 극복하는 일은 자아가 <자기self> 쪽으로 침잠할 때만 가능하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산만한 흐름(한 생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다니는)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욕망(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다니는)도 <위대한 사람>을 만나면 진정된다. 우리는, 외적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가 외계의 현실을 <그 자체로>, <그것만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p203

<자기self>라고 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에 날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동시에 두 레벨에서 사는 것, 동시에 두 세계를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는 사람은, 전과 다름없이 외부적인 임무를 다하면서 <자기>가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하여 꿈과 외부적인 사건에서 양면적으로 사용하는 암시나 신호에 주의를 기울인다. p212

사람은 자기의 내용이나 개성화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때만 무의식의 의미심장한 메시지의 내용이나 개성화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전우주와의 일체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 세상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이 긴장감은 참으로 대단하지 않겠는가? 반면에 자신을 비하시켜 통계자료에 불과하다고 할 경우 그 사람의 삶은 의미있는 삶일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을 현실의 자신보다 훨씬 나은, 위대한 어떤 것의 일부로 느끼는 사람은 튼튼하게 땅을 딛고 설 수 있다. p217

물론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고 무의식의 묵시적인 명령을 따르는 일이 늘 유쾌한 일일 수만은 없다. 우리가 친구들과 일요일 나들이를 계획하고 있는데, 꿈은 그 나들이를 말리면서 나들이 대신 창조적인 일로써 일요일을 보내라고 요구할 때도 있다. 우리가 무의식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르기로 한다면, 우리 의식이 입안한 계획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도(우리가 따라야 하는 의도, 혹은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도)가 방해를 받는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개성화의 과정에 부수되는 의무가 축복이기보다는 짐으로 느껴지고는 하는 것이다. p218

세론(世論)의 조종자가 자신의 활동에 상업적 압력이나 파괴적인 수단을 가할 때 그 활동은 일시적으로는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대중의 순수한 무의식적 반응을 억압하는것일 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집단을 억압하면, 개인을 억압할 때와 마찬가지 결과가 생긴다. 즉 집단이 신경증적인 분열이나 심리적인 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의식의 반응을 억압하려는 이같는 시도는, 기본적으로는 우리 본능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p222

사람이 자기 삶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든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자유를 의미있는 창조행위에 쓸 때만 비로소 해방도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산다는 것의 내적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다. 우리가 개성화 과정을 극히 중요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p224

나는, 어느 시대에서든 예술가는 그가 속한 시대정신의 표현수단이며 대변자라고 하는 심리학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술가의 작품이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술가는 시대의 특성이나 가치를 유형화시키는 존재이다...(중략)...프랑스의 화가이며 평론가인 장 바제느는 '현대회화에 관한 노트'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그릴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시대에 가능한 그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1차 세계대전중에 사망한 독일의 예술가 프란츠 마르크도, <위대한 예술가는 과거 속에서 자기의 위상을 찾으려 하는 대신,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의 진실하고 심오한 중력의 중심을 측정한다>고 주장한다. p250

자연과 우주를 검증하려고 할 때마다, 객관적인 성질을 탐구하거나 발견하는 대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그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p308


책지도
last modified 2009-12-04 00:1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