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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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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8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민음사

읽은 사람보다 제목을 아는 사람이 천 배는 많을 듯한 밀란 쿤데라의 유명한 책. 이 책에 대해서는 사랑에 대한 책, 프라하의 봄에 대한 역사적인 책, 혹은 삶의 본질을 무게에 비유한 철학서 등등 많은 해석이 있다. 물론 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키치에 대한 혐오를 다룬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도대체 키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어떤 것들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걸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싫어하는 그것들이 키치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러 가지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시키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흐름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p288

그리고 키치란 그 모든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서술방식이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이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는 어떤 것일까? 신? 인류? 투쟁? 사랑? 남자? 여자? 여기에 대해선 각양각색의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각양각색의 키치도 있게 마련이다. 카톨릭 키치, 개신교 키치, 유태인 키치, 공산주의 키치, 파시스트 키치, 민주주의 키치, 페미니스트 키치, 유럽 키치, 국가주의 키치, 국제주의 키치. p294

말하자면 키치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부정한 채 가상의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온 어떤 장면도 나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하지 않았으며 종종 등장하는 에로에로한 장면 또한 얼굴을 붉히게 하기보다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만들었으니, 혹 누군가가 나처럼 제목과 명성이 주는 무게감에 부담을 느끼고 펼쳐들기를 주저했다면 용기를 내어 일독하기를 권한다. 20091125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절모를 썼을 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시키는 것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의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전이 될 것이다. p104

프란츠의 아버지가 느닷없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어느 날 문득 어머니 혼자 남게 되었던 것은 그의 나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였다. 프란츠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고 의심했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평범하고 차분한 말투로 비극을 감추었다. 시내를 한바퀴 돌자고 아파트를 나오는 순간, 프란츠는 어머니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당황했고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두려웠다. 그는 어머니의 발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두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가 고통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p106

그녀가 이 성당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것은 신이 아니라 아름다움이었다. 이 성당과 연도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소란스런 노래 속에서 며칠을 보냈던 청년 노동대와 비물질적 유사성을 지녔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미사는 마치 배반당한 세계처럼 느닷없이, 음성적으로 그녀에게 나타났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름다움이란 배반당한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그 아름다움이란 박해자들이 실수로 어딘가에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만이 만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노동절 행렬의 배경 뒤편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배경의 화폭을 찢어야만 한다. p130

사비나에게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며, 우리가 하는 것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그것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133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p144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는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하게 미지의 것이다. p145

그녀가 프란츠에게 묘지에서 산책한 일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몸서리를 치며 묘지를 뼈와 돌조각의 하치장에 비교했었다. 그날 그들 사이에 몰이해의 심연이 깊게 패였다. 오늘에 와서야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그녀는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가 참을성이 없었다는 점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p147~148

토마스는 라디오를 끄고 말했다: "세계 어디에나 비밀경찰은 있게 마련이야. 하지만 그들이 도청한 녹음을 라디오에 방송하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어! 어디에도 없는 일이지!"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하고 테레사가 말했다. "나는 열네살 적에 일기를 썼었어요. 누군가 그것을 읽을까 두려워 다락에 감추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결국 찾아냈어요. 어느 날 식사 시간에 수프를 먹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호주머니에서 일기를 꺼내들고 이렇게 말했어요. <모두들 잘 들어!> 하더니 큰 소리로 읽으며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식구들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고 먹는 것도 까맣게 잊었지요." p156

집단수용소, 그것은 밤낮으로 서로 뒤엉켜 사는 세계였다. 잔인성과 폭력은 그것의 부수적(전혀 필연적이지 않은) 측면에 불과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었다. 친구와 술을 마시며 토론할 때 자기 집에서조차도(그것이 치명적 실수임에 틀림없다!) 안전하지 못했던 프로사스카는 집단수용소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의 테레사는 수용소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수용소란 전혀 예외적인 것, 놀랄 만한 것도 아닌 뭔가 주어진 조건, 뭔가 근본적인 것,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있으며 온 힘을 다해 극도의 긴장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p159

이런 것들이 어렸을 때부터 테레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똑같은 물음들이었다. 왜냐하면 진짜 심각한 물음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단순한 물음만이 진짜 심각한 물음이다. 그것은 대답이 없는 질문이다. 대답이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이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이란 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의 경계선을 긋는 행위인데, 대답없는 질문이란 그런 대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란 뜻이다. p 162

인간을 여러 범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간이 일생 동안 종사하는 이런저런 직업으로 그들을 인도한 이러한 깊은 욕구에 입각한 것이리라. 프랑스인 하나하나가 다르다. 그러나 전 세계의 모든 배우들은 그들이 파리, 프라하, 그리고 시골의 가장 후미진 극장의 배우라도 서로 닮았다. 배우란 어렸을 적부터 익명의 군중에게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천부적 재능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그렇지만 재능보다 훨씬 심오한 그 무엇인 이 근본적 동의가 없다면, 누구도 배우가 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사란 일생 동안 인간의 육체를 다루며 그에 부수되는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이다. 그를 의대 1년차에 해부학 교실에 들어가도록 하고 6년 후 의사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동의(절대 천부적 재능이나 재주는 아니다)이다. p222

그는 테레사의 그 어느 것도 들춰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 있던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는 세 개의 육체를 열기 위해 사용하는, 그의 상상력의 메스를 채 손에 쥐기도 전에 그녀와 정사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정사중에 어떨 거라고 궁금해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이미 그녀를 사랑해 버린 것이다. 사랑의 역사는 그 뒤에 가서나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그는 다른 여자들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았던 그는, 문득 그녀는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와 그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메타포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p240

마당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것: 사랑이 고조된 순간 뱃속에서 끈질기게 꾸르륵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 배신하고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배신의 길 중간에서 멈출 수 없는 것: 대장정의 행렬 속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것: 경찰이 숨겨둔 도청 마이크 앞에서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것 등. 나도 직접 이런 상황을 겪어보았다. 그러나 나의 이력서 상의 내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해 갔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바로 이 경계선(그 너머에서 나의 자아가 끝나는)이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255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성숙도를 높이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중략)...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의 역사가 덜 피투성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p258~259

여러 가지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무화시키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흐름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내가 전체주의라고 표현한 까닭은 키치에 훼손을 가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주의의 발현(모든 이의 제기는 미소짓는 연대감의 얼굴에 내뱉은 가래침이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주의(사소한 세목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자는 있는 그대로의 삶, 그 자체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키치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버린 어머니나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해서 <교미하여 번식하여라>는 신성불가침한 슬로건을 위협하는 남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제수용소라 불리는 것은, 전체주의적인 키치가 자신의 쓰레기를 버리는, 회의주의의 구덩이라 할 수 있다. p288~289

프란츠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대장정이란 개념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성향의 좌익 인사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정치적 키치였다. 대장정이란 앞을 향한 멋진 전진, 그리고 장정이 대장정이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평등,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소비사회의 거부인가, 생산의 증대인가? 단두대인가, 사형제도의 폐지인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좌익 인사를 좌익 인사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저런 이론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라도 대장정이라 불리는 키치 속에 통합하는 능력인 것이다. p294~295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독일 가수와 미국 여배우가 이런 경우에 속하며 주걱턱의 신문기자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다. 독자들에게 익숙해져서 그의 주간지가 소련인에 의해 정간당하자, 그는 백 배나 산소가 희박해진 공기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는 누구도 수많은 미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는 곳마다 경찰의 미행을 받고, 전화를 걸 때마다 도청당하고, 심지어는 거리에서 은밀하게 사진까지 찍힌다는 사실을 알았다. 갑자기 익명의 시선이 도처에서 그를 따라다렸으며, 그러자 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는 연극배우 같은 목소리로 벽에 숨겨진 소형 마이크에 대고 소리치곤 했다. 그는 경찰 속에서 잃어버린 관객을 되찾은 것이다. p308~309



책지도
last modified 2009-11-27 00:38:22